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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n 25. 2021

공주님 말고 노동자



  

나는 기로 위에 서있다. 공주님처럼   있는 기회가,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아이들은 어느새 아홉 살과 일곱 살이 되었다. 육아의 강도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 둘째가 다섯 살이  해부터이다.  해가 바로  때다. 학교로 돌아가 너무 신이  나머지   먹고   자고 공부하다가 병을 얻었다. 아무튼  해는 돌봄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축소된 해이다. 저희들끼리 서로 돌보고, 서로 배우고, 같이 놀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홈스쿨링을 선택하면서 잠시 상황이 달라지기도 했었지만, 이제 다시  아이는 아침이면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유치원으로 간다. 청소와 요리, 아이들 경쟁력 높이기에 열정을 쏟는 편도 아니다 보니   덩어리 시간이 내 앞에  여졌다. 불안, 초조, 강박을 일으키던 질병과도 그럭저럭 벗하며 지내게 되었고, 살림의 기술을 갱신할 생각이 없다 보니 정말 공주님처럼   있는 기회가 찾아온  아닌가 싶다. 공주님이라니! 외형상, 취향상 나는 공주님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런 나에게도 ‘공주님처럼' 유혹은 강렬하다. 불편한 진실에서  발짝,  발짝 떨어져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순진한 얼굴로 아름다움만을 좇을  있다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지적 유희와 심미적 유희로만 가득 채우고 싶다. 그런데 그런 삶을 진짜라고   있을까? 현실을 편집한 삶을 진실한 아름다움이라 부를  있을까?


운 좋게도 나는 지금껏 돈에 초연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게 따져보면 나의 인격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는 당신들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부모님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장학금과 연구비 등 많지는 않지만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지원을 받으며 지냈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벌이로 가계를 꾸려왔다. 그래서 초연할 수 있었다. 의미만을 좇아도, 재미만을 쫓아도 괜찮았다. 적게 쓰는 것으로 만회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운이 다한다면? 그때도 초연할 수 있을까? 정말 운이 좋게 계속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치자.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러고 싶지도 않다. 임신과 출산 이후 꽤 오랜 시간을 여성의 인권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지냈다. 때론 소심하게 때론 과격하게 투쟁했고, 갈등했고, 화해했다. 여전히 그런 일들을 반복하며 매일 조금씩 조화를 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육아와 가사의 부담이 줄고 보니, 남편이 짊어진 밥벌이의 고단함이 보인다. 직군의 특성상 ‘소진’을 피할 수 없는데, 아직까지 제도화된 중재 프로그램이 없다. 개인이 휴직을 해서 쉬는 방법 밖이다. 나는 최소한, 남편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고 필요한 때에 안식월을 가질 수 있도록 자본을 확보해야 한다. 시작은 파트타임이겠지만. 아무튼 공주님 말고의 선택을 한다. 이 선택지는 가능성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다양한 실험과 좌절, 눈물과 뿌듯함, 불편한 진실까지도 끌어안은 단단한 진짜 아름다움의 가능성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공주님 말고 노동자, 가능성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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