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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n 23. 2021

볼썽사나워질 용기

내가 내 시간을 찾아 쓰기 위한

타인의 시간을 (뻔뻔스럽게!) 가져다 쓰고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면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심리적, 또는 물질적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넌덜머리가 난다. 더불어 상대의 요구가 부당한 것임에도, 나의 시간과 노력이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드는 나의 '착해 빠진’ 태도 역시 신물이 난다. 아주 오래전 한 선배가 예견했던 바이다. “소정씨가 자신의 시간을 찾아서 쓰지 않으면 남들이 그 시간을 다 가져다 쓰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부디!” 이 묵시론적 예언은 대기 중에 떠돌다가 반복적으로 실현되었다. 


사례 1. 편집 디자인 과정을 마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인으로부터 의뢰를 하나 받았다. 간단한 포스터 작업을 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로고 브랜드 디자인은 처음이었다. 작업은 총 한 달 반 가량의 기간이 걸렸다. 기획과 의견 교환 등을 하는 데에 쓴 시간을 제하고 순수하게 컴퓨터 앞에서 시안을 작성하고 수정하는 데에 대략 40시간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다. 디자인이 완료된 후 파일 변환 등의 자잘한 요청들이 이어졌는데 점차 요청이 줄다가 그걸로 끝이었다. 의뢰가 아니었다. 의뢰가 아니었나? 작업을 시작하기 전 지인과의 나눈 대화를 복기하며 사전에 계약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느라 작업에 소요한 시간만큼의 시간을 허비했다. 


사례 2. 이건 좀 더 집요하게 실현된 경우다. 일 년 반 정도 근무했던 곳의 고용주는 박사 과정 중이었는데 어느 때고 불쑥 ‘지금 통화 가능해요?’라는 문자를 보내서는 논문 번역을 다음 주까지, 발표 자료 정리를 내일까지, 데이터 검토를 오늘 밤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고용주는 언어를 아주 교묘하게 조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부탁’의 프레임 대신 “OO에서 발표가 정해졌어요. 발표 제목 고민해보고 내일까지 알려줘요.”라는 ‘전달’의 프레임을 사용했다. 마치 발표를 맡은 사람이 나이고 고용주가 친절하게 일정을 상기시켜주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명백하게 부당한 상황, 몇 번이나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고용주는 끈질겼다. '내가 계속 요구하면 네가 그중에 몇 가지는 하겠지.'라는 식으로 업무와 무관한 요청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사례 3. 아, 만만치 않게 화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이다. 몇 년 동안 연락도 주고받지 않은 관계, 혈연이라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불쑥 일을 들이민다. 한 번은 문자로 첨부 서류를 하나 받았다. “내일 아침까지 번역해서 보내줘.” 메시지는 달랑 한 줄. 그냥 무시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모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까 싶어 꾸역꾸역 해서 보냈다. 이런 경우엔 보통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상상해보라. 이런 일을 겪은 후의 기분을. 정말이지 별로다. 정말이지 스스로가 싫어진다.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떠올려 보지만 뭐 글쎄. 가장 최악인 것은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가 안 된다.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에는 이해 대신, 한판 싸움 대신, 멀리멀리 도망가는 쪽을 선택한다. 그래 왔다. 휴우. 그런데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럴 순 없다.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분노해야 한다. 볼썽사나워질 용기를 갖는 일이 나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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