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박수근 전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겨울 해거름의 거리는 차갑고 어두웠다.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고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걷고 있었다. “엄마, 저 사람 꼭 엄마 같다.” 걸음보다도 더 빨리, 시선을 재촉하던 나는 아이와 함께 멈추어 섰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을 묘사한 청동 조각상이 있었다. 책 읽는 여인상이라니, 그것도 나의 어린 사람에게 그렇게 보였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뭐, 얼마쯤은 사실이다. 나는 최근 4개월 동안 짬이 날 때마다 정신없이 읽었다. 근사함과는 거리가 먼, 도피의 수단이었지만. 그렇게 읽다가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 ‘난정’을 만났다. 고통의 시간, 자기를 보호하는 방편으로 "끝없이 읽는” 행위를 선택한 난정은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다”라고 말한다. ‘맞아, 맞아.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는 맞장구를 치며 더 멀리 도망갔다. 사정은 이랬다. “이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그냥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그래 단 한 줄도.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다. 나는 컴퓨터 앞에 정지된 상태로 아주 오래도록 앉아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슬럼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첫 책도 출간하지 않은 신인 작가였다! 꼴랑 단편소설 서너 편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겨우 그걸 쓰고 슬럼프라고?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뭉개졌다.” 혹시, 제 대변인이신가요?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의 화자는 나에게 빙의한 게 분명했다. ‘소설’이라는 단어만 ‘삽화’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했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잠식해갔고, 나는 숨을 쉬기 위해 난정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작업을 정말 겨우 끝냈다. 책 읽는 여인상 앞에 선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내 사정은 우리 아이들이 더 잘 아니까. 그래도 그것 아시는가?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 여사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같이 많이 읽는 애는 언젠가 쓰게 된다.(..) 뭐든 쓰렴.”이라고. 작업의 마감과 동시에 불타오른 창작열 (아, 얄궂은 창작열이여!) 나 이렇게 뭐라도 쓰고 있으니, 뭐라도 그리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아니,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