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살찐 것 같아 = 너 사랑받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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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런던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고 나의 1학기는 시작된 지 어언 중반을 넘어가고 있을 시점이었다.(런던은 대부분 9월에 1학기가 시작된다) 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일러스트 공부는 나와 잘 맞았고 교수님들과 친구들도 참 좋았다. 꽤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듯해 보였다.
거울 속을 집요하게 흘끗 대는 나의 모습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 집요했다. 차라리 고개를 들어 한낮의 태양을 보는 게 거울 속 나를 보는 것보단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물은 흐를지언정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머릿속에서 너 살찐 것 같아라고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건. 그 소리 때문에 안 그래도 제대로 보지 못하겠는 거울을 더욱 흘금거리는 나였다. 학교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들어갈 때마다 전면 거울을 똑바로 응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오직 손에만 집중하며 물에 손을 씻어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에게 너 살찐 것 같아 = 너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하나의 수학 공식 같은 거였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공식을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말이다.
누군가 내게
아이야, 누가 너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식을 가르쳐 줬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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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작은 체중계가 있다. 하지만 무서워서 체중계 위로 올라가 보지 못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상황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실제로 살이 쪘으면 어떡하지. 나의 머릿속 또 다른 나의 말이 사실이면 어떡하지. 나는 그녀의 말이 사실일 때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왜인지 칼을 뽑아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던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굶고 다음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늦은 밤 잠이 오질 않아 보고 싶었던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봤다. 긴장되는 밤과 어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를 왜 이제 봤나 싶은 재밌는 영화였다. 와중에 여배우가 참 말랐네. 라고 생각한 나였다.
다음 날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온 후 체중계 위로 올라갔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발을 올렸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봤다면 굉장히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굉장히 경건한 의식이 맞다. 아주 불안하고도 두려운 경건한 의식. 눈을 가늘게 뜨고 체중계에 뜬 숫자를 봤다. 47… 세상에 5kg가 쪘다. 심장이 쿵 쿵.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5kg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리고 47이라는 숫자 또한 미친 숫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정체성의 문제였다. ‘42kg인 나’만이 ‘나’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그런 나’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협하고도 좁은 지옥 같은 세상 속에 사는 나’에게 이 일은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불안이 내게 밀려 들어왔다. 강한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저항할 수 없는 그런 불안이었다.
갑자기 불어난 5kg을 빼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벌을 줘야 했다. 너는 이제 최대한 굶어야 해.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침에 공복 유산소를 하자. 간헐적 단식과 공복 유산소라는 건강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나는 나 자신을 매일같이 혹사시켰다.
사실 나의 목적은 건강도 아니었으며 다이어트도 아니었다. ‘사랑받을만한 내가 되기‘였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로부터?
나는 누구에게 사랑받고 싶은 건데 대체?
그때는 몰랐다. 나는 누구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지조차 모르는 존재라는 걸.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나는 한낮에도 태양을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나를 혹사시키는 이 패턴에 문제가 생겼다. 몸무게에 집착하며 굶다 보니 음식에 집착하게 되었다.(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디저트류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폭식을 하는 날이면 아예 작정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마트에서 닥치는 대로 아이스크림을 쓸어 담았다. 왜냐하면 아이스크림은 게워내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하겐다즈, 벤엔제리, 로투스 아이스크림을 차례로 숙청시키는 중이었다.(당연히 사이즈는 파인트) 먹고 다 토해낼 생각이었다. 나의 두 눈은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고 있었는데 내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의 나는 굶주린 짐승 또는 좀비 같았다. 두 눈은 화면을 보고 있지만 보지를 못했고 입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지만 맛을 느끼지 못했다. 뇌는 생각이라는 걸 거칠 틈이 없었다. 그냥… 사람이길 포기한 존재 같았다. 묘사해 보자면 숨 쉬는 덩어리. 그날의 나를 신이 지구 밖에서 관찰하고 있었더라면 반짝거리는 사람들 틈에 너무나도 대비되는, 세상을 집어삼킬만한 허기를 가진 어둠의 소녀였으리라.
그렇게 채워지지 않아 여전히 허기진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이렇게 해야 억지로 토할 때 수월하다)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손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목 끝을 할퀴기 직전 입 안에서는 비누 향이 번졌다. 그 뒤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온몸에 힘이 빠진 채로 변기 물을 내린 후 바닥에 풀썩 앉았다. 예고되지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병신 같다. 병신 같다. 병신 같다.
세수를 하며 거울 속 나를 봤다. 역시나 구렸다. 토한 직후라 그런지 사람이 더욱 미워 보였다. 인간의 흰자위가 저렇게 탁할 수 있나 싶었다. 초점 없는 회색빛 눈. 나는 거울 속 나를 자세히 보지 않으려 힘 없이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나왔다.
하루… 이틀…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을 시작으로 두 번째는 과자 그다음은 케이크, 도넛, 등등…. 나는 여름날 상온에 둔 아이스크림처럼 천천히 그러나 정말로 녹아내려 갔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내 방에서는 먹토를 하는 이중생활은 나를 천천히 익사시키고 있었다. 그게 내 몸이든 영혼이든. 어찌 되었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날 이끌었으니까. 진짜로 먹지 말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아, 이러다 정말 타지에서 영영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 날이 있었다.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런 날이 있었다.
오늘은 꼭 부모님께 꼭 다 말씀드려야지. 도와달라고 해야지.
엄마… 아빠… 나 토해… 나 자꾸 먹으면 토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말들을 흘러가게 내버려 두며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아빠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딸,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아빠 옆에 있는 엄마와 동생의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겹쳐 함께 들려왔다.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눈물이 흐르지 않게 두 눈에 힘을 꽉 주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들킬까 헛기침도 두어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응 아빠. 나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날카로운 단도가 되어 나의 환부를 후비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다음에는 꼭 말해야지….
통화를 끊고 밀린 눈물을 흘리느라 정신없이 밤을 지새운 날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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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축 처진 이불이 마치 나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