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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마틸다 그리고 다리가는 나의 학교 친구들이다. 클로이는 영국에서 자란 중국인, 마틸다는 영국인, 다리가는 카자흐스탄에서 자랐다.
클로이와 나는 서로 성격이라던가 관심사라던가 비슷한 부분이 많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꽤 맞는 말인 것 같다.
마틸다는 매주 금요일마다 들어야 하는 워크숍의 같은 그룹에 배정된 친구였다. 처음에는 아는 친구가 없어서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상냥한 마틸다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첫 대화 때 마틸다는 나의 그림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의 그림이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며 신기한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친해진 계기는 나의 그림에 대한 그녀의 팬심…이었다. 좋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난 보통 눈물이 날 때, 푹 꺼질 때, 마음이 불안할 때 그림을 그렸으니까.
다리가는 마틸다와 클로이와 이미 안면을 튼 사이었다. 그렇게 우리 넷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자연스러웠다.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넷이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같은 과 다른 친구들이 함께일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점심시간. 아침과 저녁을 이어주는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시간. 누군가는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겠지만 나는 점심시간이 참 무서웠다. 점심시간이 무서웠던 걸까,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무서웠던 걸까. 아니 먹어서 살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무서웠던 걸까.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우린 강의실에서 나와 칸틴 Cantin이라고 부르는 교내 식당 겸 매점을 향해 내려갔다. 나는 점심을 잘 먹지 않았다. 도시락도 잘 싸가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점심을 스킵한다고 말하곤 했다. 거짓말. 사실 나는 무언가를 먹는 나의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음식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음식을 우물거리는 나 자신이 지독하게 미련해 보였기 때문에 먹을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미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클로이, 마틸다, 그리고 다리가는 나와 달리 음식 앞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배고플 때 식사를 하고 배부르면 먹지 않았다. 우아한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미련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딘가 잔뜩 고장이 났는데, 그렇지 않아 보이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는 허기 앞에서 군침을 삼키며 입맛이 도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꼈다. 배고픔이라는 것이 영원히 사라지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했다. 웃음이 넘치는 점심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 홀로 웃음 가면을 쓴 사람 같았다.
하루는 이길수 없는 허기에 져버린 날이었다. 몸이 아팠다. 수업 시간에 정신을 차리려면 오늘은 허기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다. 마틸다가 쉬는 시간에 자판기에서 초코볼을 뽑아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루미 너도 초코볼 먹을래?
마틸다의 그 말이 나에겐 평생을 기다려온 말처럼 느껴졌다.
초코볼 하나를 먹었다. 달콤했다. 하나를 더 먹었다. 달콤했다. 하나를 더 먹었다. 그만 먹어. 또 다른 내가 속삭였다. 이상한 죄책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뻗은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마틸다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초코볼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초코볼 한 움큼을 입 안으로 두세 번 털어 넣는 상상을 하며 말이다.
먹고 싶다.
하루종일 생각했다. 먹고 싶다고.
그냥 먹고 싶은 게 아니라 폭식을 하고 싶었다. 무얼 먹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먹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양을. 겨울잠을 자기 위해 곰이 뱃속에 식량을 비축하듯 말이다.
초코볼을 먹지 말 걸 그랬어.
이건 다 그 초코볼 때문이야.
그 초코볼 하나가 문제였다. 그 초코볼 하나가 스노우볼이 되어 나를 깔아뭉갤 심산으로 나에게 데굴데굴 굴러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그 초코볼 하나가 문제였을까?
나는 그날의 나에게 진심으로 질문해 본다. 정말로 그 초코볼 하나가 문제였냐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초코볼 하나로 자멸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트에 들렀다. 달콤한 간식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경주마처럼 전진했다.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는 절대로 굶는다 내가. 누군가 쿠키와 초콜릿을 담는 나의 눈빛을 읽을까 봐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내가 내 돈 주고 사 먹는 건데 뭐.
도로 뱉어내긴 할 거지만.
오늘만 먹기로 다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분주히 칼로리 계산을 하는 내가 참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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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1.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마다 나는 나의 마음속에 커다란 나무뿌리가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을 만큼 뒤엉킨 뿌리들. 나는 왜 배가 고플까. 무엇에 이리도 배가 고픈 것일까. 먹으면 해결이 될 일인가. 아닌 것 같은데. 먹는다는 건 무엇일까. 나의 물음은 더 깊은 곳의 물음을 꺼낼 뿐이었다.
2.
개미떼가 달큰한 향을 따라간다. 누가 사탕을 떨어뜨렸나 보다.
개미들아 사탕을 맛보아선 안돼.
아니야 사탕은 아무 잘못이 없어. 개미들아 사탕을 물고 밝은 빛이 비치는 쪽으로 달려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