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생식 이야기
겸허히 있는 그대로 식사한지 대략 2년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다.
물론 늘 고비도 있고 유혹도 있다.
하지만 생식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정말 괄목할만하다.
그 변화는 앞으로의 삶에 엄청난 동력이 된다.
막연히 생식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생식이라?? 흐음... 글쎄...
오상아(吾喪我,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말-나는 스스로를 장례지냈다는 의미로 쓰임)...
나는 익숙한 나와 결별할 수 있을까?
병원 생활로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스스로 느끼기에 너무나 균형이 깨진 내 몸을 바로 일으키고 싶었다.
(내 안에도 돌이 있었기 때문에)
무너진 균형은 어디서 어떻게 복원을 해야 할까?
그래서 해보려고 한 것이 생식이었다.
힘들다고만 느꼈던 생식을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급적이면 열을 가하지 않은 로푸드(Raw food) 로서 혹여 열을 가하더라도 정말 최소한의 열조리로 홀푸드 다이어트(WPBD, whole-plant based diet)를 시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과일과 해초및 야채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차려주신 밥상을 즐겨왔던지라 고기를 즐겨 먹지 않고 자란 까닭에 동물성 단백질이나 육가공류에 크게 집착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식물성 식단에 큰 저항은 없었다. (그렇다고 생식이 반드시 식물성 식이를 고집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음식이 조리된 터라 날 것 그대로의 식사가 너무 익숙지 않았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곡식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주식이던 쌀은?? 빵은??
'탄수화물은 필수가 아니라고 했던가? 더욱더 중요한 단백질과 지방 섭취에 좀 더 신경 써보라고?'
생식을 해보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다가온 '낯선 날 것들과의 조우'...
그와 함께 내 삶에서 초가공 식품들은 전부 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초가공 식품들이란 50도 이상의 열조리를 한 것들,
밀가루를 비롯한 정제 음식들(각종 빵, 면, 튀김류들), 설탕이 든 음식들, 설탕 시럽 등등...
전부 끊었다...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러고 나니 솔직히 별로 먹을 게 없어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에 좀 우울해지고 막막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던가??
막상 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생과일과 생야채의 맛이 너무 잘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각이 더욱 살아나서인지 식물에 내재된 단맛이나 여타 다른 향과 맛을 더 잘 느끼게 되었다. 재료 본연의 맛이란 게 이런 걸까?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사 먹는 음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조미료를 가미하는 음식이라든가 여타 가공 음식을 먹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질기고 단단하기에 오래도록 조심스럽게 꼭꼭 잘 씹어야 한다. 천천히 식사를 할 수밖에 없어진다. 정말 집중해서 씹게 되고 기타 잡음이 가미되지 않은 '온전한 감각'을 맞이하게 된다. '당근의 달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감탄하며, 당근에 감사함을 느끼고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비단 당근만 그럴까?
제철에 나는 온갖 싱싱한 식재료들에 눈길이 가고,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서,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그들이 자라온 환경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어진다. 뿌리내린 흙에 따라서, 고도에 따라서, 그 토양을 품고 지내온 독특한 맛을 자아내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입맛을 갖추면 아무거나 함부로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한 입의 맛이, 그 식재료가 지내온 계절과 환경을 품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또 철마다 맞이한 음식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게 된다. 제철의 식재료를 음미하며, 계절을 느끼고 절기의 중요한 의미를 몸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의 한 구절처럼 그 '음식'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굳이 요리라고 하는 걸 하지 않아도 특정한 조리법이라는 걸 따르지 않아도 그 식자재가 가진 본연의 맛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요리를 하지 않으니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식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음식을 오늘은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언제 먹을지, 집에서 어떤 요리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어진다. 어떤 의미로는 음식으로부터의 해방 내지는 자유랄까? 은근 오늘은 어떤 메뉴를 먹는 게 좋을지 정하는 게 스트레스인데 말이다. 그렇게 음식에 대한 욕망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다! 식탐이 줄었는데 삶이 단순해지다니!! 얼마나 먹는 것이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이는 식사할 때만 아니라 식사를 하지 않는 때까지도 포함한다. 식사 후 소화가 안 된다고 해보자 얼마나 곤욕스럽겠는가? 아니 먹음만 못하지 않은가?)
이런 삶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을 만날 일도 줄어든다.
대신 스스로 하려는 일에 더욱 몰입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소명을 찾고자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간을 더욱 귀하게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여유로워지니 무리하는 일도 없어진다. 그간 막연히 불안했던 내면에도 안정과 절제가 깃들게 된다. 의식이나 정신과 관련된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인식, 어떤 의미로는 메타인지가 더 발달한 거 같은 느낌마저 든다.
몸이 좋아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몸은 더욱 가벼워지고 뱃살은 저절로 들어가며 식곤증이란 것이 없어졌다. 몸에는 더욱 에너지가 생기며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 간다. '사소한 것들'조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음식을 절제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오래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는 양도 줄어든다.
점점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 느껴진다. 그때부터 고민이 되었다.
식도락을 좋아하던 내가 생식을 하면서 식탐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 끼를 먹더라도 정갈하면서 담박한 깨끗한 음식을 먹고 싶은 바람이 생긴 것이다. 마음 놓고 안심하며 물에 씻어서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싶은 그런 먹거리들. 그런 것들이 결국 나를 건강하게 해 줄 테니 말이다.
그러려면 무언가를 덜어내야만 했다.
내가 추구하게 된 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은' 밥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농약을 가하지 않은, 화학 퇴비를 가하지 않은 것들. 촉진제를 넣지 않은 것들. 이런 것들은 소위 '유기농 식자재'라 불리는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유기농 식자재 마트를 가서 보았지만 가격적으로도 부담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유기농'이 아니란 사실에 실망이 컸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그러려면 그 식자재를 키워내는 이의 성품과 사람됨을 믿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먹을 것에 무엇이 들어가고 어떻게 키웠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식을 위한 '바른 먹거리'. 이 것을 찾아 나서려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모든 분들에게 이렇게 하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공경하지 못한 시간이 많아서
삶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되찾으려는 분들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분명 여러분의 삶이 한결 단순하고 편해질 것이다.
생식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그간 몰랐던 스스로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삶의 매듭과 여유가 생긴다.
포기하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오상아(吾喪我)' - 나는 나를 장례 지낼 수 있는가?
이 말은 '생각이 바뀌게 되었을 때 진정한 자유와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장자의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