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하천의 상관관계

언제나 당연했던 당신을 생각하며.

by Chet

1.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혼자서 지나간 일들을 대책 없이 추억하며 걷는 산책도, 예상치 못한 우연한 행운 같은 산책도, 그저 이 길이 영원히 끊기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산책도 있었다. 혹은 혼자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비겁한 회피 목적의 산책도 있는가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함에 부딪혀 터져버릴 것 같을 때 걷는 산책도 있었다.


너는 우리가 굽이 뻗어있던 하천의 길을 야금야금 먹어가며 걷던 그 발걸음들을 기억하는가. 그때 나누었던 대화들은 겨울에도 지지 않고 듬성듬성 피어있는 동기의 야화처럼 부분 지지 않고 남아있지만, 같이 지면에 내디뎠던 발의 리듬은 어린 날 흥얼거리던 노래처럼 어제와 같이 생생히 되새길 수 있다.


요즘 오랜 일들이 바로 어제와 같다고 느끼는 날들이 많다. 익숙한 그곳을 떠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문하게 된 역사 앞에서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그 지난 풍경을 따라 그렸던 스케치가, 그 연필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떠올리게 된 지난날들을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부여하는 시간의 나이테가 전혀 아무 의미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의 마지막 산책을 기억하는가.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의 짙게 눌러쓴 볼펜자욱 같은 무거운 발걸음들과 한쪽 귀에서만 흘러나오던 노랫말들을, 듬성듬성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 불빛이 계속해서 빈 공간을 만들었을 때를.


2.

지금 자주 같이 걸었던 하천의 벤치에 앉아 글을 써. 얼마 전, 태풍이 심하게 불어서인지 하천의 수심이 올라가 마치 우리가 물 위를 걷던 것 같던 밤, 순간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너는 알까. 빠르게 흘러가는 유속 안에서 힘껏 움츠려 일렁이던 조악한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이 대책 없이 날 슬프게 하더라. 듬성듬성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곳에 그냥 숨어버릴걸, 그저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해야 했던 것처럼 길을 걷다가 늘어난 수심에 산책로로 밀려와 뻐끔뻐끔 숨만 쉬던 이름 모를 물고기를 같이 봤던 순간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밤마다 산책로에 새겨지던 나무 그림자들을 다시 우리의 그림자로 뭉개버릴 순 없을까


3.

당신이 이곳에 잠깐 들렀다 간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3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어요. 아직은 도회의 서늘한 불빛이 낯설긴 해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서늘한 채도에 맞춰 몸의 빛깔을 바꿔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곳을 같이 오고 싶었는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얼마나 토라졌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위대한 제국의 성벽들과 같은 높은 빌딩이 불규칙하게 둘러싸고 있는 가도를 걸을 때면, 시든 꽃과 같이 푸석한 고개를 떨군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좁은 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비치면 시든 꽃잎이 혹여나 떨어질까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빛에 손을 내밉니다.


따뜻함을 내제 한 사람들.


어둑한 새벽 우리가 하천을 걸을 때, 산책로에 덩그러니 움츠리고 있던 오리들을 기억하나요. 이곳에도 길을 걷다 보면 그 오리들처럼 한껏 움츠린 사랑 같은 것이 있어요. 이곳의 사람들은 푸석한 손을 내밀어 한껏 움츠린 사랑의 등위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가고자 했던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듯이 저도 등위에 푸석한 손을 한 번 올려볼까요.


언젠가 당신이 이곳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을 때, 저도 같이 맞장구를 쳤던가요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서늘한 채도에 몸의 빛깔을 바꿔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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