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 치아
"웃음은 삶의 양념이자, 치아를 통해 발현되는 가장 인간적인 표현이다."
—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화장실 컵에 틀니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입술은 오므라들어 있다가 틀니를 끼우면 활짝 펴졌다. 우리는 숯불에 구운 고기를 좋아했는데, 할머니는 압력밭솥에 찐 부드러운 갈비를 좋아하셨다.
부모님도 어느덧 어릴 적 할머니 연세가 되셨다. 두 분 모두 여러 개의 임플란트 시술을 하셨다. 시술 전, 빠진 이가 부끄럽다며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대화하셨다. 머리의 반이 하얗게 샌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빠진 이를 보려고 고개를 휙휙 돌렸다. 어머니 입안의 커다란 빈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웃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엄마인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 한편이 짠했다.
살면서 별 문제가 없던 치아가 요즘 들어 말썽이다. 음식을 먹고 나면 이가 욱신거리고, 양치질을 하면 잇몸에서 피도 자주 난다. 잦은 회식과 스트레스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조금씩 심해졌다.
"노화는 언제 끝날까?" 나이가 들면 오래된 중고차의 외관과 부속품이 낡아지듯 몸의 여기저기서 변화가 나타난다. 머리가 하얗게 새며 숱이 적어지고, 피부는 건조하고 칙칙해진다. 관절의 통증, 침침해지는 시력, 이전보다 떨어지는 체력. 노화는 몸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어느새 일상의 불편함으로 당당히 자리 잡는다.
치과 치료는 다른 치료와 달리 심리적으로 부담이 크다. 간단한 치료로 끝날 수도 있지만, 발치나 임플란트 같은 대공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치아와 잇몸은 점점 약해지며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치아는 음식을 씹는 소화의 첫 단계일 뿐만 아니라, 웃을 때 드러나는 중요한 외모 요소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다녔던 치과를 찾았다. 영상 검사를 진행한 후 치료실로 안내되었다. 치료 준비를 위해 유니트 체어에 앉았다. 옆에 준비된 수납함에 안경을 벗어두었다. 소독약 냄새와 가지런히 놓인 금속 도구들, 옆자리에서 들리는 모터 소리. 편한 척 눈을 감았지만 몸은 저절로 경직되었다.
치료 전 스케일링부터 받았다. 치료가 시작되기 전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애써 긴장을 풀어보려 폰을 꺼내 지인들에게 "치과 치료 받으려고 준비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본다. “잘 받고 와”라는 시큰둥한 답변에 폰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이어지는 정적.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마취 주사를 놓을 테니 입을 벌리라는 소리가 들렸다. 긴 바늘이 잇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취약을 뿜었다. 입 안과 입 주위 피부가 얼얼해졌다. 바람을 푸~ 하고 불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랫입술이 밑으로 축 늘어진 것 같았다. 진정하려 심호흡을 해봤지만, 심장은 더 빠르게 두근거렸다.
웽 하는 모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혀를 안쪽으로 밀어주세요.” 치아를 갈아내는 소리와 이뿌리까지 전해지는 진동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혀를 다칠까 봐 최대한 반대쪽으로 힘껏 밀어붙였다. 마취 덕에 통증은 없지만, 비릿한 피 냄새는 느껴졌다. 시간이 이렇게도 늦게 가다니. 철봉에 매달려 마지막 힘을 짜내듯 혀를 반대편에 밀어 붙이며 턱을 벌리고 있었다. 쉼 없이 들리는 모터 소리, 치아를 긁는 소리, 피와 침을 흡입하는 소리가 더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은 순간, 모든 소리가 멈췄다.
정적.
“입 헹구세요”라는 말과 함께 의자가 세워졌다. 정신 없이 꿈을 꾸다 깬 것처럼, 치료실은 어느새 잠잠했다.
3개월간의 긴 치료가 끝난 후,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으라는 당부를 받았다. 시간이 되면 치과에서 검진을 받으라는 문자가 오지만, 불편함이 없으면 무시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광고 문구는 아플 때만 간절해진다. 아프면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 관리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나은 다음 날이면 신기하게도 그 결심은 뇌에서 사라진다. 치아는 단순히 음식을 씹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환한 미소를 지켜준다. 귀찮더라도 치과 검진은 주기적으로 받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