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 백내장
"진정한 시력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아버님, 수술 잘 되셨어요? 눈은 괜찮으세요?”
아내의 물음에 아버지는 TV를 보며 대답하셨다.
"잘 보이는 건 좋은데, 세상이 갑자기 모두 늙었어."
안경도 안 쓰고 TV를 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새로웠다. 늘 안경과 돋보기를 겹쳐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던 분이, 이제는 아무 도구 없이도 화면을 또렷이 보고 계셨다. 아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눈이 편해지셨다니 다행이에요. 많이 좋아지셨죠?”
아버지는 잠시 TV에서 고개를 돌리며 말씀하셨다.
“TV가 뿌옇게 보여서 소리만 듣고 지냈는데, 이제 아주 잘 보여.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전부 늙었더라. 네 엄마도 오랜만에 보니 할머니가 되어 있더라.”
그 말을 듣던 어머니는 사과를 깎으며 웃으셨다.
“늙었지, 젊어지겠어.”
아버지는 덧붙이셨다.
"내 얼굴도 몇 년 만에 제대로 봤는데, 많이 늙었더라. 내가 이만큼 나이 들었을 줄은 몰랐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이 훌쩍 지나간 것 같아."
오랫동안 뿌옇게 보였던 세상을 다시 또렷하게 마주하기까지 흘렀던 시간. 그동안 세상도, 사람들도, 그리고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봄이 되자 눈이 침침해져서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갔다. 안경사는 시력에는 큰 변화가 없으니 안과 검진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에 이제는 ‘눈 검진’이 추가된다. 불쑥 끼어든 사리 추가처럼, 나이가 들수록 관리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집 근처 안과에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대기실은 노인들로 가득했다. 50대인 내가 오기에는 너무 이른 듯한 느낌이었다. 초진 기록지를 작성하고, 낯선 기계들로 몇 가지 눈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눈은 아직 건강하지만, 백내장 초기 증상이 있습니다. 2년 주기로 검진을 받으세요."라고 했다. 큰 이상은 없다는 말이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책 보는 시간을 줄이고, 눈 영양제를 챙겨 먹으라는 잔소리가 돌아왔다.
이사한 새 집에서 밤늦게야 집 정리가 끝났다. 다음날 아침, 깨끗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예뻤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 연한 하늘 아래 파란 물결을 가르는 요트,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사거리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창문에는 비바람과 미세먼지가 쌓여 점점 유리가 흐려진다. 세상 풍경도 뿌옇게 변해간다. 백내장이 딱 이와 같다. 다행히 창문은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듯, 백내장도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
맑고 환한 출근길 아침의 풍경은 평화롭다. 신호 대기 중 마주하는 일상의 풍경. 좌회전 대기 중인 차들, 신호등 앞에서 폰을 보는 사람들, 푸른 하늘, 적갈색 벽돌의 초등학교 건물. 컴퓨터 모니터의 픽셀이 나간 듯 눈앞에 반투명한 벌레가 떠다닌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벌레가 따라 움직인다. 노안과 안구 건조증에 이어 비문증까지 추가된 것이다.
10년 전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서울에 놀러갔었다. 후배가 주말에 심심하면 '토토가'를 보라고 추천해줬다. 터보, SES, 김현정, 김건모, 쿨. 나의 20대와 함께했던 가수들이 세월이 흐른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방송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라고 혼자 한참을 울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슈퍼맨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는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못한다. 시간과 함께 우리 몸도 퇴행성 변화를 겪는다. 목뼈, 무릎 연골, 치아, 머리카락, 발뒤꿈치, 위장, 간, 귀, 그리고 눈의 수정체까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노후된다. 개인에 따라 어떤 구조와 기능이 더 빨리 노화되는지는 다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몸에서 나타나는 가벼운 변화들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무력감을 느낀다. 젊었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지금은 일상에서 나타난다. 몸 곳곳에서 불편함이 나타나면 처음엔 저항해 보지만 점차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다.
퇴행과 싸울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이다. 운동은 필수다. 건강한 식생활도 챙겨야 한다. 필요한 검진도 제때 받고, 필요하면 치료도 받아야 한다. 나이에 맞게 건강을 지키자. 나이보다 노화가 앞서가지 않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