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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Feb 12. 2022

아버지의 갈색 봉투

세상에 태어나 가족으로 만나다

합격자 발표 날이 되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계셨다. 거실로 살금살금 나와 전화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ARS 안내가 없던 시절, 담당자의 목소리로 불합격을 들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달라는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게 전화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와 책을 폈다. 

당시 입시제도는 선지원 후시험. 지원한 사람들은 해당 대학 근처 고등학교에서 함께 시험을 쳤다. 매 교시가 끝나고 아자하며 주먹을 불끈 쥐던 얄미운 옆자리 녀석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였다. 

시험 이틀 전 서울 이모 댁으로 갔다. 시험을 치고 며칠 쉬며 놀다 오고 싶었지만, 막상 시험이 끝나자 잠시도 서울에 있기 싫었다. 어머니를 닦달해 다음날 집으로 왔다. 오자마다 책을 폈다. 무슨 이유인지 책을 봐야 맘이 편했다.  


잠시 후 어머니가 거실로 나와 전화기를 드셨다. 수험번호를 말하면 들릴 답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선은 책이지만, 몸의 모든 감각은 거실의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좀 전에 거실에 나오더니 먼저 알아봤나 보네. 이제 어쩔껀데?" 

안방에 계셨던 어머니의 모든 감각은 거실로 나왔던 내게로 향했나 보다.

 

"후기에 가라. 재수는 못 시켜주겠다."

아버지는 단호하셨다. 탈락자들에게 한번 더 주어지는 기회. 몇몇 과를 제외하면 후기대학은 본인의 실력보다 낮춰가는 곳이었다. 재수를 결심했다면 대부분 후기에 지원하지 않고 곧장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후기에 가기에는 실력이 아깝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수년간 고3 입시지도를 맡고 있던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고모부. A급은 아니지만 , 갈고닦으면 B급 상위는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고모부의 설득 덕분에 아버지는 재수를 허락하셨다. 


국어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시험 난이도는 수학은 하향, 영어는 중향, 국어는 상향 평준화였다. 나보다 성적이 못한 친구들도 국어 점수는 오히려 높았다. 수학에서 힘겹게 벌어놓은 점수를 국어에서 허무하게 까먹었다.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리어카의 길보드가 유행하기도 전. 유명 학원의 강사들은 자신의 강의를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했다. 비디오 대여점처럼 학습교구 대여점이 있었다. 강의 테이프는 대부분 카피본이었다. 

80년대 국어 일타강사 서한샘. 서면에 학습 테이프 대여점이 있었다.  대여기간은 1주일.  테이프 1개는 앞뒤로 40분씩 총 80분. 2개면 학원 공부 마치고 와서, 자기 전 짬을 내서 공부할 분량으로 적당했다. 매일 저녁 졸음을 참아가며 서한샘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졸다 놓쳐 앞으로 되감기를 수시로 해가며.


테이프 때문에 서면을 오가려니 시간 소모가 많았다. 아버지에게 가게 위치를 말씀드리고, 순서대로 2개씩 빌려달라 부탁했다. 다 들은 테이프를 갈색 서류 봉투에 넣어 안방 책상 위에 두면, 저녁 내 책상 위에 다음번 테이프가 담긴 갈색 봉투가 놓였다. 주중에 소주 한잔 없이 귀가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재수 기간 테이프 때문에 주중 하루는 일찍 귀가하셨다. 간혹 한잔 하셔도 갈색 봉투는 한 번도 잊어버리지 않고 내 책상 위에 놓아두셨다. 


시험이 끝났다. OMR 작성 실수로 시험을 망쳤다. 작년과 반대로 책은 꼴도 보기 싫었다. 다음날부터 열심히 놀았다. 술을 배웠고, 나이트클럽에서 유명 DJ들이 트는 유로댄스에 맞춰 춤을 배웠다. 

책상 정리 좀 하라고 어머니가 성화셨다. 책상 위의 갈색 서류 봉투. 시험은 끝났고, 다음 테이프도 필요 없어 깜빡하고 아버지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서면 음반 상가도 구경할 겸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1년 만에 다시 와보는 대여점. 안으로 들어가 테이프 반납하러 왔다고 말하고 봉투를 내밀었다. 

"어?  이 봉투? 아드님이세요?"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필요 없는 말은 안 하시는 분인데. 오지랍 넓어 먼저 말 거는 스타일 아니신데. 나이대가 비슷하고, 같은 서면이라 오며가며 아는 사이인걸까?

"가방도 아니고 맨날 서류 봉투에 테이프를 빌려 가시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테이프를 넣고 봉투를 반으로 접어 들고 다니면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평소 절약정신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봉투가 전혀 부끄럽지도 않으셨나보다.

"올때마다 앉아서 나랑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가셨어. 아들이 재수를 하는데 시험 잘 봤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걱정을 하시던지."

경상도 남자. 무뚝뚝. 남자는 울지 않는다.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가족들과 수다 떨지 않는다. 외출하면 저 앞으로 혼자 걷는다. 운전할 때 어머니, 나, 여동생은 모두 뒷자리에 타야 한다. 가면서도 앞좌석과 뒷좌석은 대화 단절. 그런 느낌이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한의대 시험 봤다면서? 아버지가 은근 자랑하신던데."

저질체력, 내성적인 성격, 어중간한 성적, 눈물 많고 투정 많은 소극적인 아이. 아들을 못마땅한 존재로 여긴다고만 생각해다. 그래야 반항심이 정당화되니까.  

"딱 붙어야 아버지 고생 안 시킬텐데."

 

갈색 봉투에 꽁꽁 감춰둔 따뜻하고 애틋한 아버지의 사랑. 들켜서 행복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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