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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Oct 25. 2023

청미래덩굴과 함께한 시의 밤

성공스토리 - 일상의 기쁨

출발 전 몇 번이나 지도를 확인했다.

용호동에서 김해 가는 길은 동서고가로를 타면 되었다.

해운대로 이사하고는 장모님 댁을 처음으로 방문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방학 동안 한 달간 서울에서 지내기로 했다.

지도를 검색하니 동서고가로보다는 남양산에서 대동으로 가면 더 가까웠다.

시내 출퇴근용으로 몰고 다녀서 내비게이션이 없는 경차 모닝.

어둠이 내린 초행의 밤길을 고속도로로 홀로 달리려니 걱정이 앞섰다.


주말 저녁 9시의 고속도로는 한적했다.

무서운 속도로 차들은 모닝 옆을 지나쳤다.

길을 잘못 들지 않으려고 표지판에 집중하다 보니 한겨울인데도 겨드랑이는 땀으로 흥건했다.


고속도로를 내린 차는 한적한 2차로를 지나 논밭 도로를 가로질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의 좁은 도로는 낮보다 길었다.


장모님 댁 앞 빈터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바스락 겨울 흙 소리.

차 안에서 머금은 온기가 사라질세라 잰걸음으로 마당을 지났다.


마당과 통하는 거실 문을 열고 인사를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12월 마지막주 김해 시골집은 도시보다 추었다.

처남이 겨우내 춥지 말라고 가득 채운 기름이 아까워 평소에 보일러를 거의 돌리지 않는 장모님.

사위 온다고 2시간 전부터 난방을 틀었다고 하셨다.

거실이 하도 추워 슬쩍 온도를 조금 올렸다.


저녁은 집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왔다.

탁자에는 다구가 준비되어 있었고, 장모님은 끓인 물을 보온병에 가득 채워 잎차 담은 병과 함께 내어오셨다.

구수한 보이차로 시작했다.


탁자 밑에서 대학노트를 꺼내 서론 없이 대화가 시작되었다.

"다음 달에 발표할 시를 고르는데 어떤 게 좋을까?"

초저녁에 잠이 들고 새벽 2~3시에 깨면 잠이 안 와 밤새 시를 쓴다고 하셨다.

시에 새벽잠에서 깨어란 구절이 유난히 많다.


장모님은 김해시에서 주관하는 창작시 강좌를 들으신다.

거의 무료로 진행되는데, 늘 수강생으로 꽉 찬다고 하셨다.

"서 선생은 잘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잔소리만 한다. 시집도 몇 권 내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나랑 안 맞다. 고선생이 꼼꼼하게 잘 가르쳐주는데 나랑 수업 시간대가 잘 안 맞는다."

공부에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없다.

말 많고 잘난 체하는, 꾸미는데만 관심 있는 50대.

선생님 붙잡고 수업 시간 다 차지하며 자기 시를 다 뜯어고치는 60대.

자기들끼리만 수업 후 밥 먹고 차 마시러 가는 무리들.

중학생 딸의 방과 후 대화와 다를 바가 없다.


대학노트에 서 선생은 빨간 펜으로 표시만 몇 개 해놨다.

고선생은 체크하고 옆에 글씨를 잔뜩 써놓았다.

노트만 봐도 수업 스타일이 다르다.

장모님의 최종목표는 시인으로 등단이다.


다음은 으름덩굴 차.

으름이 얼음처럼 들렸고, 한겨울과 맞지 않는 여름의 차라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호 하고 불면 여전히 입김이 나오는 차가움에, 맑은 빛깔의 따뜻한 으름덩굴차를 마시니 감기 기운으로 막혔던 코가 뚫렸다. 


" 이 부분은 이게 좋을까? 이게 좋을까?"

새벽잠에서 깨어 어머니를 그리는 시였다.

마지막 구절의 단어 두 개를 놓고 고민하고 계셨다.



다음은 청미래덩굴 차.

청이라는 글자는 맑음이다.

푸를 청.

이름만으로 맑은 하늘이 그려진다.

맑음의 미래?


"오늘은 청미래덩굴이 제일 좋은 거 같습니다. 머리도 맑아지고 느낌이 너무 좋은데요?"


제가 시는 잘 모르지만, 시는 함축적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인은 단어 하나에 엄청난 고뇌와 배려를 담는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에 맞는 단어를 떠올리고, 앞뒤로 연결시켜 보고, 

뭔가 맘에 안 들어 다른 단어를 넣고,

그랬더니 앞이 어색해져서 다듬고,

앞을 고쳤더니 원래 단어가 더 적합해서 다시 고치고.

수필처럼 서술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제목에 맞는 조화로운 글이 탄생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장 결정하지 마시고, 단어를 넣고 생각하고, 읽고 하면서 고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지막 구절 단어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절주절 시에 대한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꽉 찬 방광을 더 이상 참기 힘들 때쯤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한겨울 고요한 시골집의 밤은 시와 함께 깊었다.

우당탕 천정에서 쥐가 뛰는 소리의 이질감도 정겹다.

작은방에는 전기장판이 있어 난방을 넣지 않았다고 했다.

전기장판 위에 몸을 누이고 두꺼운 이불을 침낭처럼 말아서 몸을 감쌌다.

이불속 몸은 따뜻했지만, 이불 밖 코끝은 찬바람으로 시렸다.




중학교 1학년이던 큰딸은 고2가 되었다.

장모님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고 처음 맞는 설.

작은 방 문을 여기 한쪽 벽면은 다구들이다.

벽에 걸린 몇 점의 액자는 장모님의 시였다.


그간 등단하셨고, 여러 책에 작품도 실었다.

요즘도 밤새 시를 적으신단다.

단어와 나만 남은 공간 속 정지된 시간.

글을 쓰는 동안의 제한 없는 행복.


나도 그 행복에 지극히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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