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돌이 Aug 02. 2021

왜 슬리퍼를 신고 달려?

슬리퍼를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보다 학업의 무게가 훨씬 덜했던, 아이들이 체험과 놀이가 더 중요했던 때,

아직 아이가 없어 둘만의 휴가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때, 

휴가지는 거의 매번 태국이었다.


하루 2~3천 원 게스트 하우스에서 몇 주를 지내는 배낭여행자,

패키지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신혼여행 부부,

고급 호텔에서 럭셔리 휴가를 즐기는 마크 버펄로 ,

화려한 태국의 밤문화에 취하고 싶은 사람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국적 정취가 가득한 방콕은,

봄 여름이면 망고스틴, 람부탄, 롱간, 두리안을 저렴하게 실컷 먹을 수 있다.

하루의 피로는 마사지로, 간혹 2번 받아도 과하지 않다.

70년대 시골과 21세기 도시가 혼재한 방콕의 도시에서,

태국 사람들은 슬리퍼만 신었다.


툭툭을 모는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깡마른 아저씨들

백화점, 호텔, 사무실 근무를 마치고 유니폼을 입은 채 MTS로 퇴근하는 방콕의 여성들

짙은 화장에 원피스 차림의 힐을 신고 멋을 부릴 것만 같은 태국의 트랜스젠더들

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엄마와 딸

모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렇게 온종일 슬리퍼를 신고 다니면 발이 너무 까매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 때문에 나는 슬리퍼 잘 신지 않는다. 


친척 중 한 분은 삼선 슬리퍼만 신는다. 여름에 반바지 차림으로 집에 왔는데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양말을 신고 올 때도 신발은 슬리퍼다. 명절 때는 셔츠에 타이는 아니지만 정장 차림으로 오는데, 그때도 현관에는 슬리퍼가 놓여 있다.

간혹 그의 집에 놀러 가는데, 주로 외식을 나간다. 차를 몰고 근처 식당을 갈 때도 슬리퍼. 양말을 신기 때문에 발이 까매지지는 않겠지만, 옷차림에 상관없이 슬리퍼다.


퇴근 후 나의 일상이 된 동백섬 걷기. 한 번씩 내 앞을 휙 하고 지나치는 흰색 슬리퍼. 항상 그 학생인지, 슬리퍼를 신고 뛰는 몇몇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공부하다 답답해서 슬리퍼만 신은채 뛰는지, 애초에 슬리퍼를 신고 뛰러 나온 건지도 알 수 없다.

뛰는 속도로만 보면, 슬리퍼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잘 뛴다. 한참 뛰다가 호흡을 정돈하는지 잠시 걷다 다시 뛰는데, 걷는 잠깐의 순간 흰색 슬리퍼가 확연히 보인다.


슬리퍼를 신으면 발이 까매지고, 발의 먼지 때문에 매번 발을 씻어야 해서 귀찮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면 불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근무 중에는 슬리퍼를 신지만, 밖에 돌아다닐 때 슬리퍼를 신는 경우는 해변, 계곡, 워터파크에 물놀이 갈 때 정도?


여행지에서 쇼핑은  또 다른 재미다. 19년 봄의 어느 날. 주로 옷을 보는데, 그날따라 흰 슬리퍼가 눈에 띄었다. 별 다를 것도 없는 흰색에 까만 글씨가 있는 심플한 디자인.

프리사이즈로 전시품 1개가 남은 전부란다. 깎아 달라니, 부가가치세 정도 빼줄 수 있단다. 내 맘을 간파했는지 더 이상 협상이 불가했고, 바닥에 살짝 까매지기까지 한 슬리퍼를 사고 말았다. 



19, 20, 21년. 3년째 여름 내내 흰색 슬리퍼만 신고 다녔다. 가족들이랑 외식, 바닷가 카페에서 팥빙수 한그릇, 백화점 쇼핑, 부모님 댁에 들를때도 흰색 슬리퍼였다. 

내 눈에 너무 이쁜 흰색 슬리퍼지만 가족들은 이쁜지 모르겠단다. 큰 딸은 바닥이 헤어져 보기 싫다고 버리란다. 버리면 '너 아니면 안돼'처럼 굳이 다른 슬리퍼를 살것도 아니고, 다시 운동화로 여름을 나야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소확행이라 이름 붙였다.

일상에서 만나는 나만의 행복을 나는 '일상의 황홀'이라 가치를 부여했다.

슬리퍼는 싫다던 내게 여름철 내내 '일상의 황홀'이 되어주었다.

아침 에스프레소 한잔, 몽블랑 만년필로 노트의 낙서, 꿀잠 도와주는 필로우 베개는 매일 만나는 일상의 황홀이 다.


슬리퍼를 샀던 3개월 후 다시 찾은 매장에는 바닥까지 새하얀 슬리퍼가 놓여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공평한'은  무엇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