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스물넷이야
괜찮아, 스물넷이야
8.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렇게 나는 서울 강남 3구 중 한 곳의 중학교로 무사히 발령을 받았다.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영어과 신규 최윤슬입니다. 경기도에서 정교사로 2년 근무하다 서울로 재임용 시험을 봤습니다.”
“아, 그래요?”
첫인사 겸 잠시 전화를 드렸을 때 교감 선생님께서는 매우 반색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지역과 우리 학교는 학급과 교사 수가 꾸준히 줄고 있어 신규 발령이 잘 나지 않는 곳이었다. 교사 수가 적다는 것은 교사 1인당 업무량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생 신규가 아닌, 조금이라도 학교 현장을 겪어 본 경력직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반가워하셨던 듯하다.
“아주 대단하신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실제로 2월 말 새 학기 준비 기간 전입 교사 소개를 할 때 나에 대해 저런 소개말을 덧붙이셔서 너무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때, 은연중에 처음으로 제대로 내 안의 내부적인 문제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대단한 교사라고? 아니, 이전 학교에 있을 때만 봐도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 난 수업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가끔 문득 떠올라서 해본 적 있었지. 또, 아이들에게 그렇게 관심과 사랑이 많지도 않았고......’
그런데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 대단한 교사라는 말을 들어도 될까? 단지 시험에 두 번이나 합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애초에 내가 원했던 건 서울에서 일하는 ‘교사’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서울’이라는 지역으로 돌아오는 것뿐이었을까?
문제는 또 있었다. 어찌 됐든 아직은 현직 교사인 사람으로서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전 학교에 있는 내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아이들과 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첫 학교의 아이들은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영어 실력에도 편차가 굉장히 컸다. 한 학급에 최소 대여섯 명은 알파벳을 읽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최상위권 학생들은 고등학교 모의고사를 척척 풀어냈다. 그런 학생들이 한 반에 40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과 선생님들이 가장 고충을 토로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학생들 간 영어 실력 편차에 관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전체적인 평균치가 어느 정도 맞춰져 있는, 다시 말해 학군지 지역의 학교에서 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학군지에 가면 좀 더 ‘말이 통하는’ 학생들과 함께 ‘수준 있는’ 수업을 해볼 수 있겠지. 이 얼마나 오만하고 옳지 않은 생각인가. 세간의 시선에서 본다면 교사라는 직업의 기본적인 사명감을 저버리는 생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알파벳도 모르는 그 친구들은 귀찮아서 굳이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는 거네? 네가 그러고도 교사냐?
결론만 말하자면,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지적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도록 알파벳을 읽을 줄 모르고, 무료 기초학력 방과후 수업을 열 테니 함께 그 알파벳이라도 읽는 법을 배워보자고 애걸복걸하며 독려해보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비웃는 친구들은 후자에 속했다. 나는 그 사실을, 그 기분을 견디지 못했다.
공교육에 몸담은 교사라면 영어 공부에 관심도 없는 학생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알파벳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교의 교육은 그것이 목표라는 사실을. 그 과정에서 교사라는 개인이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상처받게 되는 기분을.
어쩌면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해서 학군지인 ‘서울’이라는 낙원으로 도망쳐 온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더욱 상처를 받았다.
“이거 시험에 나와요?”
아니. 시험 문제에는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실생활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내용이니까 선생님이랑 함께 보자.
“아, 시험에도 안 나오는데 왜 해.”
“저 이미 다 풀었어요. 학원 숙제해도 돼요?”
학교란, 공교육 교사란 뭘까.
시험 문제에만 매달리고, 진짜 언어로서의 영어가 아닌 문제풀이용 영어만 공부하기를 원하는 아이들. 일찍 풀면 학원 숙제를 해도 되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
이 나라의 교육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부란 건 대체 뭘까? 실제로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겉으로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답답했던 지역을 떠나는 데 성공했고, 퇴근 후 즐겁게 도시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정작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그 작은 교실 안에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점점 숨이 막혀왔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무도 내가 점점 더 우울에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족도, 친구도, 교무실에서 함께 지내는 동료 선생님들도.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이상은 현실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