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스물넷이야
괜찮아, 스물넷이야
10.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향해 행복하게
오랜 심리상담 및 여러 검사를 통해, 직업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가 살아온 인생의 다양한 측면들에 비추어 제대로 나를 바라보고, 현재의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1.
나는 기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올곧은 면이라던가,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관이 굉장히 중요한 면이라던가.
그런데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 공감하고 있지 못하다. 즉, 내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곳이 나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결정적으로 위배되는 상태인 것이다.
혁신 교육이니, 개인별 맞춤형 교육이니 겉으론 허울 좋은 교육 정책들이 참 많다. 요즘 현장에서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 고교학점제도 처음에는 그런 취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절대 다수의 학생들은 ‘대학 입시’라는 단 하나의 종착역만을 향해 공부한다. 고교학점제의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학생들은 1등급을 받기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교육부가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고, 교육청에서는 교사들에게 전문성을 강화하라는 둥 여러 가지 변화를 요구해도, 여전히 본질은 대학 입시이다.
수업에서 학생들을 위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할 때, 학생들은 묻는다. “그래서, 이거 시험에 나와요?”
그때 교사가 느끼는 무력감을 아는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순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학원 숙제를 꺼내 몰래 풀기 시작하는 학생들을 보고도 못 본척해야 하는, 자존감이 땅끝까지 짓밟히는 기분을 아는가.
나는 지나치게 올곧아서 이런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지내며 대학 입시를 지나온 사람이지만, 막상 직접 그것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달랐다. 수동적으로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일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교사로서의 나는 어찌 됐든 능동적으로 대학 입시를 향한 교육에 일조해야 했다. 한국식 문법 위주로 영어 수업을 해야 했고, 수업 중 학원 숙제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생활기록부에 좋은 문구를 써주어야 했으며, 학교보다 학원을 중요시하는 학생들에게 크게 반박하지도 못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대학 입시에 공교육과 사교육 중 어떤 것이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겠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공교육이라고 답할 수 있는 교사가 몇이나 될까?
교무실의 선생님들조차 오늘 학원 숙제는 했니, 모의고사는 몇 등급, 중간고사는 몇 등급이 나왔냐며 자녀들과 통화를 한다. 분명 10분 전에는 담임 반 학생에게 대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점수에 목 매지 말아라, 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던 분들이었다.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 있는 내내 온몸으로 시시각각 체감되는 이 무자비하고 또 자주 위선적인 간극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내가 옳지 않은 시스템에 영원히 일조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답답해서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고만 싶었다. 이 또한 학군지에 오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교직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여러 가지로 준비해보는 중인 지금도, 결코 재임용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2.
교육 시스템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과목의 문제도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잘했다. 어릴 때 유치원 방과후에서 선생님이 틀어주시던 영어 동요를 뜻도 모르고 되는대로 따라불렀다. 조금 더 커서는 해리포터 영화를 보고 시리즈에 푹 빠져 부모님을 졸라 원서를 사서 몇 년 동안 홀로 독파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어는 내게 술술 읽히고, 자연스레 들리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한국식으로 관계대명사, to 부정사, 하며 영어를 배운 적은 중고등학교 때가 전부다. 그때도 사실 to 부정사가 뭔지 제대로 이해는 못 했다. 이 문장은 to가 들어가는 게 원래 자연스러운 건데, 이게 부정사라니까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대충 그런가 보다 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교사로 임용된 이후에도 수업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문법 부분을 전부 새롭게 공부하며 자료를 준비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아이들이 학원 문법 문제를 들고 와서는 이건 관계대명사냐, 관계부사냐 같은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했던 영어는 영문법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 그 자체로서의 영어였다.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실감 나게 전달하는 대사, 팝송을 부르는 가수가 맛깔나게 노래하는 가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나직하게 전달해주는 지문과 대화 속에서 살아있는 영어였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국내 소설도 좋아하지만 나에게 소설이라는 장르의 재미를 일깨워준 것은 단언코 영미 소설이었다. 해리포터와 같은 청소년 소설 시리즈로 시작해서, 폭풍의 언덕 같은 세계 문학까지 혼자 섭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심심할 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내가 스스로 영어로 소설을 쓰고 혼자 흐뭇하게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영어교사가 되니 이러한 것들은 하등 쓸모가 없어졌다.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관계대명사가, to 부정사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내가 사랑한 영어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영어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교직에서 완전히 마음이 뜬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새로운 길이 나타난 듯했다.
그래, 난 소설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지. 영어로 된 소설도, 한국 소설도 모두 좋아했어.
3.
그래서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향해 두 가지를 모두 준비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영문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대 영미 소설 분야의 연구자가 되는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가능하다면 영문학계에 남아 내가 사랑해 마지않고 끝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이 분야에 꾸준히 기여하는 훌륭한 연구자가 되고 싶다.
두 번째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쓸 것이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습작처럼 블로그에 써둔 글들이 5백 편이 넘는다. 이토록 사랑하고 열정을 가진 분야라면 한 번 사는 인생, 후회하지 않고 자신 있게 끝까지 도전해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쓴 나의 소설로 다른 이들이 오래도록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타인의 소설로 하늘 위 구름을 떠다니는 듯한 행복을 느꼈듯이.
그렇다면 나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교사가 아닌, 그냥 나라는 사람 한 명으로서.
괜찮다. 아직 스물넷이니까. 나는 아직 푸르르게 젊고, 하고 싶은 것이 넘치게 많은 스물넷이다.
오늘의 나는 이 모든 준비의 과정에서 내일의 나를 기대하며 행복을 느낀다.
멈춰있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고 있는 내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고마워, 나의 스물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