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와 오해의 밤
내 방에 메트리스 커버, 옷걸이, 스탠드, 샤워 커튼까지 하나하나 설치하는 것을 제이슨과 크리스가 도와주었다. 그렇게 함께 꾸미다 보니, 내 방은 점점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공간이 되었다.
처음으로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에 뿌듯함이 스며들었다. 가족 단톡방에 방 사진을 올리며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말 대신, 자연스럽게 나의 근황을 전할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며칠 함께 밥도 먹고, 장도 몇 번 같이 보다 보니 룸메이트들과도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에밀리에게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연결해준 인연 덕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매번 메모장 앱에 직접 문장을 써서 보여주는 그 정성이 고마웠다.
그렇게 함께 지내는 동안, 내 영어도 조금씩 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크리스가 내 방 문을 두드리더니 갑자기 내 나이를 물어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국에 온 뒤로 아무도 내게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물음은 낯설었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I'm twenty-one years old”
(나 스물한 살이야)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크리스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So I guess you're old enough to enjoy the party with us! I was thinking of having a back-to-school party at our place tonight, and I wanted to check with you first. Would you be okay with that?”
(그럼 이제 우리랑 파티해도 될 나이네! 오늘 밤에 우리 집에서 개강 파티 하나 열까 하는데, 너 괜찮은지 먼저 물어보려고. 괜찮을까?)
개강파티라는 말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미국 대학생 특유의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연스럽게 파티 준비도 함께 하기로 했다.
크리스와 제이크는 파티 얘기를 꺼내자마자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고, 우리는 다시 월마트… 아니, 왈마트로 향했다.
처음엔 "뭐, 파티 준비라고 해봐야 맥주 몇 캔 정도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쇼핑카트를 무려 두 대나 꺼내 든 제이크가 한 마디 했다.
“Trust me. We’re gonna need space.” (진짜야, 우리 공간 많이 필요할 걸?)
그 말은 진심이었다.
맥주 한 박스는 기본. 그보다는 거의 작은 냉장고 하나를 옮기는 느낌에 가까웠다.
과일 코너에서는 파인애플, 수박, 딸기 등 여러 가지가 섞인 과일팩 두 개를 들어 카트에 실었고, 그걸 본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This’ll soak it all up with vodka. It’s gonna be fire.”
(보드카랑 같이 먹으면 딱이야. 분위기 그냥 불 붙는다!)
곧이어 줄줄이 담긴 건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술병들 보드카, 럼, 위스키, 데킬라까지.
거기에 탄산음료와 오렌지 주스 같은 믹서들까지 카트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는 곰 모양 젤리(gummy bear)를 들더니 말없이 내게 윙크를 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단순한 파티 준비가 아니라, 미국 대학생들이 진짜 어떻게 즐기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신호임을 깨달았다.
집에 도착하자 우리는 곧장 준비에 돌입했다.
거실 한쪽에 놓인 거대한 아이스박스에 온갖 재료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얼음을 두 팩이나 부은 뒤, 과일, 보드카, 럼,위스키, 테킬라, 각종 음료를 국자로 휘저으니, 그 유명한 Jungle Juice가 완성되었다.
곰 젤리들은 깊은 플라스틱 용기에 옮겨 담긴 후 보드카에 폭 잠겼다.
크리스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Few hours later, these things will mess you up in a cute way.”
(몇 시간만 지나면, 얘네가 널 귀엽게 헤롱거리게 만들 거야.)
나는 마치 새로운 문물을 처음 접한 원시인처럼, 감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파티 준비를 도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집은 점점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크리스는 어디서 사왔는지 모를 사이키 조명을 키더니 모든 방과 거실에 있는 불을 다 껐다. 그리고 스피커를 연결하자, 둥둥 울리는 베이스가 거실 바닥을 진동시켰고
Travis Scott, Post Malone, Doja Cat, Drake… 익숙하면서도 낯선 클럽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낯선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왔고, 모두가 “Yo!”, “Hey!”, “What’s up!” 을 외치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좁은 거실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주방 구석에는 물담배(hookah)가 설치됐고, 누군가는 맥주캔에 구멍을 뚫어 입으로 술을 붓는 Shotgun을 시작했다. 그러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건 길게 연결된 깔때기와 호스로 술을 들이붓는Beer Bong이 였다.
제이크가 거대한 깔대기에 호스를 연결하고 술을 붓더니 내게 말했다.
“You gotta open your throat before it flows, or it’s gonna explode back up.”
(목부터 열고 넘겨야 해, 안 그러면 위로 확 올라온다니까)
“Just tilt your head back and don’t think. Just chug.”
(그냥 고개 젖히고 아무 생각 하지 마. 그냥 들이켜)
말 그대로, 목구멍을 미리 열어놓지 않으면 맥주가 역류해서 온몸이 젖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깔대기 끝을 입에 물었고,
“Chug! Chug! Chug!” (쭉! 쭉! 쭉!) 소리에 맞춰 눈 감고 그대로 들이부었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탄산과 술, 정신없이 삼켰고 끝냈을 때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 한가운데서 크리스가 외쳤다.
“Yoosuk! Welcome to real America!!!”
(유석! 진짜 미국에 온 걸 환영해!!!)
정신없고 어이없고 낯설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도 수많은 미국 대학생들 속에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던 미국 드라마 속 파티를 실제로 즐기고 있어서였을까? 그 순간, 정말 내가 미국 대학생이 된 게 실감났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스쳐 지나가다가도, “Hey, man!”이라는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주먹을 맞부딪쳤고, 내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얘기가 퍼졌는지,
어느새 누군가는 내 손에 Jungle Juice 한 컵을 쥐여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술에 절여진 젤리를 건넸다. 술은 생각보다 독했고, 음악은 점점 빨라졌으며, 사람들은 소파 위, 부엌 테이블 위, 어디든 앉고 서고 흔들었다. 시간이 꽤 흘러, 파티의 열기에도 점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 방문을 마치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벌떡 뛰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문을 열자, 눈앞에 경찰이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체형, 그리고 권총과 무전기를 찬 허리띠.
나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Hands on your head. Kneel down. Go sit on the couch.”
(손 머리 위로! 무릎 꿇어! 소파에 가서 앉아!)
경찰은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고, 나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머리 뒤로 손을 얹고, 무릎을 꿇은 채 거실의 소파로 옮겨 앉았다.
룸메이트인 제이크와 크리스도 같은 모습으로 거실에 앉아 있었고, 크리스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Someone called the cops. They think someone’s using drugs in here.”
(누군가 경찰을 불렀어. 여기서 누가 마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대)
신고가 접수된 건 같은 아파트 단지의 누군가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집이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다.
경찰은 정중하게 “Can we search your room?” (우리가 당신 방을 수색해도 되나요?)
라고 물었고, 나는 당황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 문이 열리고, 경찰관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옷장, 책상, 가방까지 뒤지더니, 마침내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지퍼백,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야한가루.
경찰이 들고 있으니까 정말 마약처럼 보이긴 했다.
경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퍼백을 들고 물었다.
“This was behind your toilet. Mind telling me what this is?”
(이게 당신 화장실 변기 뒤에 있었어요. 이게 뭔지 말해주시겠어요?)
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건 며칠 전, 교회 권사님께서 아들 같다며 새로 입주한 나를 위해 챙겨주신 선물 중 하나였다.
바로 죽염.
“입안이 헐었을 때 조금 머금고 있어 봐요. 입맛 없을 때도 괜찮고요.”
그 따뜻한 말과 함께 건네받은 죽염은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욕실 선반 위에 올려두었었다.
그러다 욕실을 청소하던 날, 무심코 손이 스치면서 그 지퍼백이 변기 뒤로 떨어졌고,
공간도 좁고 귀찮아서 그냥 놔둔 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죽염 하나가 무장한 경찰 앞에서 내가 해명해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크리스 말로는 마약을 숨기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변기 뒤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왜 경찰이 굳이 그 좁은 공간까지 들여다봤는지 이해가 갔다.
문제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죽염을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는 거다.
그때 겨우 머릿속을 스친 단어, 죽은 대나무니까... bamboo?
하지만 생전 처음 미국 경찰 앞에서, 그것도 무장한 채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 침착한 설명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나는 입술을 더듬으며 간신히 외쳤다.
“베…배엠부 솔트! 바…밤부 솔트! 베엔..벤부 솔트!”
그렇게 애타게 외쳤지만, 경찰의 얼굴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그는 무언의 손짓으로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고,
지퍼백을 들고 동료들과 무전을 주고받으며 냄새를 맡고 흔들어 보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You’re good. You can go back to your room now.”
(더 이상 문제는 없어요. 이제 방에 가셔도 돼요)
나는 방으로 돌아오며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죽염 때문에 경찰 조사까지 받게 될 줄이야…’
침대에 다시 누워 한숨을 내쉬는데, 온몸이 축축하게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일이었고,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다.
참으로 길었던 하루를 떠올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날 밤, 나는 자유의 나라에서 진짜 오해의 자유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