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날의 시험은 영어가 아니었다

첫날의 긴 여정

by 김세원

오늘은 ESL 레벨 테스트를 치르는 날이다.
전날부터 시험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속이 조마조마해서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도 온통 걱정뿐이었다. 결국 밤새 뒤척이다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침이 되자 몸은 무겁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이어폰을 끼고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을 달래 보았다. 시험 시작은 오전 10시지만 1시간 일찍 도착할 계획으로 아파트 문을 나섰다.

시험을 예약한 뒤로 긴장될 때마다 구글 맵을 켜서 건물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거리를 다시 계산하곤 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 덕분일까. 길을 걷는 내 발걸음은 오히려 당당했고, 이어폰 속 노래를 따라 흥얼거릴 여유도 생겼다.

10분쯤 걸었을까.
차량이 쌩쌩 달리는 넓은 4차선 도로를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마침 맞은편 건물 외벽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독수리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커다란 전광판엔 빨간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Welcome back to school!” (개학을 환영합니다!)
“Back to school and ready to grow!” (다시 학교로! 이제 성장할 준비 완료!)

괜히 나를 향해 응원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과 두려움 사이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고, 설렘도 느껴졌다.

내가 시험을 치르게 될 장소는 International Office Building이다.
학교 웹사이트에서 여러 번 확인했듯, 이곳은 비자 서류 처리, ESL 관련 업무, 그리고 ESL 수업까지 모두 이 건물에서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실제로 도착한 건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대략 4층 정도 되는 벽돌 건물로, 외관은 단정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웅장함은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는 다소 좁았고, 강의실 역시 학교 홈페이지에서 봤던 사진 속 공간보다는 훨씬 더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 차이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금방 이해가 갔다.
이곳은 거대한 강의가 열리는 곳이라기보다는, 행정 업무와 실무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짧은 행정 안내 음성. 그런 소리들이 이 건물의 성격을 말없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예약 확인 이메일에서 받은 장소로 조심스럽게 도착했다.
2층 201호 문 앞,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예정보다 꽤 일찍 도착한 탓에, 무엇을 하며 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그 순간,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We'll start the test in 10 minutes.” (10분 뒤에 시험 시작할게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작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음의 준비도, 몸의 준비도 덜 되어 있었기에, 긴장이 그대로 몸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사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필리핀 사람, 중동계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그러면서도 참 신기했던 건, 같은 아시아 사람들끼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만으로도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은 시험의 시작을 알리듯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며 방 안을 가리켰고, 몇 번 컴퓨터 앞에 앉으라고 차례대로 안내했다.
나는 앞선 사람들의 동선을 유심히 살폈다. 실수하거나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직원이 내 차례쯤 되자 명단을 들여다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Uh… Yoo… suck? You… suck?”

나는 순간 멍해졌지만, 곧장 손을 들며 말했다.
“Yoo-seok. Not ‘you suck’… haha.” (유석이야. ‘You suck’ 아니고 하하)

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Oops! Sorry about that. Tough one. Alright, Yoo-seok. Room 201. Good luck!”

(앗! 미안해요. 이름 좀 어렵네요. 좋아요, 유석 씨. 201호예요. 행운을 빌게요!)

긴장감이 조금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웃고 나서 시험장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다시 숨이 꺾였다.

방 안에는 언뜻 봐도 50개는 훌쩍 넘는 컴퓨터가 넓은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각 자리는 조용했고, 다들 말없이 자기 자리에 앉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안내받은 자리로 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눈앞에는 모니터, 헤드셋, 그리고 마우스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화면엔 간단한 안내 문구와 함께 'Start' 버튼이 깜빡이고 있었다.

화면의 안내문에는 전체 시험 시간과 주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시험은 리딩, 라이팅, 그리고 스피킹 순으로 진행되며, 객관식 문제의 경우 마우스로 정답을 클릭하면 자동으로 채점된다는 설명도 있었다. 눈으로는 차분히 읽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다시 슬금슬금 긴장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하는 순간, 시험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리딩 파트였다. 화면에는 몇 단락짜리 지문이 떴고, 그 아래에 객관식 문제가 이어졌다. 문장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단어는 익숙한 것 같은데, 막상 문맥이 잘 안 잡혔다. 한 문장을 해석해 놓고도 ‘이게 맞나?’ 싶은 찜찜함에 지문을 두세 번씩 다시 읽곤 했다.

시간은 흐르고, 눈은 점점 모니터에 고정됐다. 어느새 주변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입식 교육으로 다져진 내 영어 실력에서, 그래도 점수를 제일 잘 받아야 하는 파트는 리딩이라는 것. 어쩔 수 없이 몸에 밴 방식대로, 수능 볼 때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를 머릿속에서 구분해 가며 보이지 않는 선을 열심히 그었다. 지금 내가 무슨 시험을 치는 건지 잠깐 헷갈릴 정도였다..

그다음은 리스닝 파트였다. 헤드셋 너머로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화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순간, 공항에서 만났던 텍사스 사투리의 영사관, 그리고 에밀리, 크리스, 제이크 등 미국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의 억양과 속도가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면 뭐, 껌이지라는 자신감이 잠깐 올라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머릿속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부딪쳤고, 해석은 들릴 듯 말 듯 오락가락했다.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문제가 튀어나왔고,

한번 놓친 내용은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지나간 건 그대로 끝이었다.

라이팅은 제한 시간 안에 주어진 주제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이 더뎠다.
어떤 문장을 써야 자연스러울까. 지금 너무 쉬운 단어만 나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많아질수록 문장은 끊겼고, 몇 번이고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짧은 문장 하나를 쓰고 다시 지우고, 겨우 연결된 두 문장을 읽고 또 망설였다. 머릿속에선 하고 싶은 말이 얼추 정리됐는데, 영어로 옮기려니 어딘가 어색했다. 문장을 한 번 쓸 때마다 스스로의 영어 실력을 의심했고, 문법보단 그냥 어색함이 먼저 눈에 밟혔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문장을 마침표로 마무리했을 때, 남은 시간은 1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은 스피킹. 가장 걱정했던 파트였다. 화면에 질문 하나가 뜨고, 몇 초 뒤에 녹음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질문은 "What do you usually do on weekends?" (주말엔 보통 뭐 하고 지내싶니까?)
개강파티가 떠올랐고, 그 순간 삐식 웃음이 났다.

크리스랑 이 얘기를 자주 나눴던 덕분인지, 생각보다 영어가 막힘 없이 술술 나왔다.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연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말이 계속 흘러나오는 내 자신이 조금은 놀라웠다. 하지만 다음 질문 앞에서는 순간 멍해졌다.
"Talk about a teacher who influenced you and why."

(당신에게 영향을 준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왜 그분이 인상 깊었는지도 함께 말해 주세요)
"Do you think social media has more positive or negative effects on young people?"

(소셜미디어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준다고 생각하세요?)

말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수십 개의 문장이 스쳐 갔지만, 그중 어떤 걸 골라 말로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순간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말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더듬긴 했지만, 스스로 멈추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녹음 종료 알림음이 들렸을 땐, 이제야 떠오른 좋은 문장들이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직원이 학교 캠퍼스 지도를 건네주며 말했다.
"Please go to Office Building, Room 107."

(오피스 빌딩 107호로 가주시면 됩니다)
지도 위에는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구글 맵을 켜서 그곳으로 향했다.

107호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기 줄은 조용했고, 다들 각자의 핸드폰을 보거나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40분쯤 지났을 무렵,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내 이름을 불렀다.
“Yoo-seok?”
그는 부드러운 인상에 살집이 있는 사람이었고, 손짓으로 나를 자신의 오피스로 안내했다.

그의 사무실은 꽤 아기자기했고, 책장과 벽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와 각국 전통 문양이 새겨진 소품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Hi Yoo-seok, I’m Dr. Nick. But feel free to just call me Mr. Nick.”

(안녕하세요, 유석 씨. 저는 닥터 닉이에요. 편하게 미스터 닉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닉은 ESL 코스를 담당하는 선생님이었고, 나의 첫 수업도 아마 그가 맡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됐다. 낯선 학교에서 처음 마주한 친근한 얼굴이라 그런지, 이 사람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하더니, 곧 A4용지를 한 장 출력해 내게 건넸다.
"This is your ESL level test result."

(이게 ESL 레벨 테스트 결과예요)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Reading: Level 4 (읽기: 4단계)

Grammar: Level 4 (문법: 4단계)

Listening: Level 3 (듣기: 3단계)

Writing: Level 3 (쓰기: 3단계)

닉은 설명을 덧붙였다. 레벨 4는 한 학기 수강하면 끝나고, 레벨 3는 두 학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의 말투는 친절했고, 설명은 이해하기 쉬웠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닉과 함께 학교 계정 아이디와 이메일을 만들고, 수업 등록 방법과 일정 확인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함께 살펴보다 보니, 어느새 정말 이 학교의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캠퍼스, 여전히 자신 없는 영어.
그런데도 마음 한켠은 조금 놓였고, 곧 시작될 첫 수업을 생각하니 조용한 설렘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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