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음을 내민 손이, 무겁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도움 속 배신감, 그리고 배려의 경계

by 김세원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는 제법 미국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친구들도 생겨서 학교 생활이 조금씩 즐거워지고 있었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학교 카페테리아 옆에 있는 여러 나라 음식점들 중에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메뉴를 고르는 일도 나만의 또 다른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ESL 수업도 처음엔 긴장되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사실 한국 중·고등학교 때 지겹도록 배운 문법과 독해를 영어로 다시 배우는 느낌이라, 내용 자체는 그리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좋은 점은, 매일 영어를 써야 한다는 환경 덕분에 그날 배운 표현이나 단어를 바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다 보면, 배운 내용이 조금씩 내 것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 좋은 감각이 좋았다.

그날은 크리스랑 함께 내가 좋아하는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리스에게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이 취소되었고, 나는 혼자 밥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학교 주변 식당들은 대부분 점심시간에 Lunch Special을 운영하는데, 10달러 안팎의 가격으로 다양한 메뉴를 든든하게 먹을 수 있어서 항상 행복한 고민을 하였다. 식당 앞에는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나도 그 뒤에 서서 메뉴판을 정독하며 무슨 음식을 먹을지 상상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내 뒤쪽에서 낯익은 말투가 들려왔다.

“한국분이세요?”

뒤돌아보니, 아직 소년 티가 남은 듯한 남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말투도, 눈빛도, 조심스럽고 어딘가 낯을 가리는 느낌이 있었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신가 봐요?”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실, 학기 시작 전 나는 혼자 다짐을 하나 했었다. 교회 사람들 외에는 가급적 한국인 친구를 만들지 말자. 학비를 생각하면 영어 실력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늘려야 했고, 그래서 ESL 수업에서도 일부러 한국 학생들을 피해 다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뭔가 달랐다.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그렇고, 어딘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런 느낌 덕분인지 마음이 풀려, 기꺼이 자리를 함께하게 됐다.

그 친구는 자기 이름을 김민준이라고 소개했다. 오랜만에 듣는, 정말 전형적인 한국인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함께 음식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놀랍게도, 민준이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왔다고 했다.

가벼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 민준이는 조금 깊은 이야기까지 꺼냈다. 사실 민준이는 애초에 미국에 올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두 분 모두 새 가정을 꾸리시면서, 자신도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라고 했다. 자의보다는 타의에 가까운, 결정이라기보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고 하였다.
이곳에 와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 있다는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무거워졌다.

그래서일까. 민준이는 아직 미국 로밍도 안 된 폰을 쓰고 있었고, 숙소도 아직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미국 통장도 없고, 학교 이메일도 잘 확인 못 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집은? 폰은 아직도 로밍이야?”라고 물었을 때,

민준이는 작게 웃으며 “영어를 잘 못해서요…”라고 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민준이는 한국에서도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ESL 레벨 테스트 결과도 거의 대부분 레벨 1 수업으로 배정받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문득 내가 미국 댈러스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름도 모르는 갈색 머리 여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마음속으로 했던 다짐도 함께 생각났다.
‘지금은 내가 도움을 받지만, 언젠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오면, 그땐 내가 먼저 손 내밀자.’ 그래서 나는 민준이를 미국에 잘 정착시켜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일 먼저 한 건 핸드폰 로밍이었다. 나는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민준이의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우리를 차에 태워서 통신사랑 은행에 같이 가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점심 약속을 갑자기 취소했던 게 미안했던 모양인지, 크리스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민준이에게는 가지고 있는 서류는 전부 챙겨 나오라고 말해두고, 우리는 크리스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익숙한 척, 마치 이런 일은 매일 하는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민준이를 데리고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면, 민준이 앞에서 멋있는 형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중간중간 못 알아듣는 영어가 나올 때면 아는 척하며 크리스를 슬쩍 쳐다보았고, 크리스는 내 눈치를 알아채고는 자연스럽게 나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2시간도 채 안 되어 핸드폰 개통도 하고, 은행 계좌도 만들고, 필요한 절차들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민준이를 호텔에 다시 데려다주는 길, 에밀리에게 연락을 해서 학생 아파트 빈 방이 있는지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민준이가 머물고 있는 호텔 로비에 앉아 밀린 이메일도 같이 확인해 주며,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나 주의할 점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민준이는 연신 고맙다고 말했고,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에 나도 괜히 뭉클해졌다.
아, 이게 그때 제이슨 형이 나를 도와줬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예전에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스스로도 좀 멋져 보였다.

그런데, 그때부터였다.
민준이는 그때부터 정말 별것도 아닌 것까지 나한테 하나하나 물었다.
처음엔, 뭐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일정보다 민준이의 일을 처리해 주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민준이가 학교 어드바이저에게서 급하게 미팅 요청을 받았다며, 나보고 같이 가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납 서류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파티마와 아메드랑 함께 발표 준비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민준이는 실망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것도 못 해주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며칠 뒤엔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에밀리를 통해 계약한 아파트에서 전구를 교체해야 하는데, 집주인에게 대신 전화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순간, '이런 것까지 내가 해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답답함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결국 민준이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민준아… 나도 너랑 똑같이 처음 미국 왔어. 근데 전구 하나쯤은, 이제 네가 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나는 그런 말을 하고 나면 민준이가 조금은 미안해하거나, 반성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민준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됐어. 몇 번 도와줬다고... 왜 짜증이야!!?”
말 끝나기 무섭게, 통화는 끊겼다.

나는 그대로 멍해졌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게, 진짜로 느껴졌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선의로 다가갔다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배신감으로 돌아온 건.

그동안 얼마나 내 시간을 쓰고, 말도 행동도 조심스레 걸러가며 배려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민준이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민준이도 나에게 별다른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제이슨 형을 만났을 때,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형은 조용히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마치 자기도 익숙한 이야기인 듯, 자신이 겪었던 배신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그러곤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좋게 말하면, 네가 정말 잘 도와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민준이라는 친구가 혼자 설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 일 수도 있어.”

그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이 머릿속 깊은 곳을 울렸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배신감이 가시지 않아 마음속으로 민준이를 욕하곤 했다. 하지만 결국, 욕하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먼저 민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준이는 반가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주었고, 곧바로 조심스럽게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속엔 지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미국 생활이 자신에게는 너무 벅차고 힘들었다며, 며칠 동안 부모님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켠이 묵직해졌다.
민준이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나는 미국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예전만큼 쉽게 나서지 않게 됐다. 스스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면, 괜히 못 본 척 피하기도 했다.

민준이와의 기억은 내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과 생각을 이해하며 그에 맞게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누군가를 도와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그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건넨 진심이었기에, 민준이에 대한 서운함인지, 아니면 도와준다는 이름으로 오히려 민준이의 힘을 빼앗아버린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인지, 여러 감정이 아직도 내 안 어딘가 깊숙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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