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마음의 울림
민준이를 공항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씁쓸했다.
매일같이 오던 연락이 멈추고 나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한동안은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고, 처음 느껴보는 낯선 외로움이 마음속 깊이 차올랐다. 그래서 며칠간은 내 표정도, 말투도, 전처럼 밝지 않았다.
그날도 ESL 수업이 끝난 뒤, 아메드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했지만, 괜히 혼자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과는 반대 방향인 교정 뒤편 주차장 쪽으로 일부러 돌아 걸었다. 그렇게 한 바퀴 돌면 40분쯤 걸리는 길이었지만, 그냥 그날은 그렇게라도 걷고 싶었다.
한 20분쯤 걸었을까. 캠퍼스 뒤편, 넓은 주차장 끝자락엔 차 몇 대만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던 흰색 혼다 시빅 한 대가, 타이어를 바닥에 갈기며 내 앞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급정거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차의 뒷자리와 조수석 창문이 동시에 스르르 내려갔고, 그 안에서 백인 남자 둘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까 싶은, 앳되고 철없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한 명은 금발 머리에 희죽희죽 웃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빨간색 모자를 거꾸로 쓴 채, 팔꿈치를 창틀에 걸치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자 갑자기, 놈들이 원숭이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입을 우그러뜨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까지 튀기면서 마치 장난극이라도 하듯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해댔다. 그리고 외쳤다.
“Hey, Yellow Monkey!” (야, 노란 원숭이!)
누구라도 단박에 알아챌 만큼 노골적이고 뻔뻔한 모욕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들을 향해 눈만 깜빡일 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놈이 들고 있던 일회용 컵을 내 쪽으로 휙하고 힘껏 내던졌다.
순식간에 빨간 액체가 내 흰 티셔츠를 강타했다.
목덜미에서부터 어깨, 가슴, 옆구리까지. 끈적한 음료가 피부를 타고 흘렀고, 옷은 금세 얼룩투성이가 되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표식을 남긴 것처럼.
하필 그날 입은 건 하얀 티셔츠였고, 그 음료는 유난히도 눈에 띄는 진한 붉은색이었다.
모욕적인 말들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더럽혀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내 자신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다.온몸이 마비된 듯 얼어붙었는데, 그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운데 손가락을 천천히, 아주 뻔뻔스럽게 들어 올렸다. 곧이어 고막이 찢어질 듯 울리는 엔진 소리를 남기며, 차는 굉음을 내고 도로를 박차고 달아났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끈적한 음료는 내 피부 위에서 천천히 마르고 있었고, 뺨은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인지, 분해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몇 초 사이, 세상은 낯설고도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대로, 멍한 상태로 집까지 돌아왔다.
집에 오는 동안 무슨 길을 걸었는지, 어떤 사람을 지나쳤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거실 한켠에서 제이크와 크리스가 나란히 앉아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내 모습을 본 크리스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What happened? Did you kill a zombie or something on your way here?"
(무슨 일이야? 여기 오는 길에 좀비라도 죽이고 온 거야?)
평소 같았으면 나도 웃으며 맞장구치고, 한술 더 떠서 장난을 쳤을 테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없이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고,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내 방문을 여는 소리에 크리스와 제이크가 각자의 방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둘 다 걱정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나는 꽤 담담한 목소리로 그날 내가 겪은 일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크리스와 제이크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미국 욕들을 쏟아내며 그 사람들을 거칠게 욕했다. 그 말 하나하나에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마나 나를 아꼈는지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제이크는 잠시 조용해지더니아주 단호하고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Hey, You Seok. Just remember this, okay? I see you as my family.
Yeah, the guys who messed with you were white but the person who sees you as family is white too. So don’t think of it as racism. Those guys weren’t racist. They were just crazy. Seriously."
(야, 유석. 이것만은 꼭 기억해줘. 나는 너를 진짜 가족처럼 생각해. 그래, 너한테 못되게 군 애들은 백인이었지. 근데 너를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도 백인이야. 그러니까 그걸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진 마. 걔네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어. 그냥 미친 애들이었을 뿐이야. 진심이야.)
제이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말이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나만큼 화를 내고 위로해 준 이들 역시 전부 백인이었다.
모욕을 준 이들은 백인이었지만, 그 상처에 분개하고 날 감싸준 것도 백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저 나를 모욕한 백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다는 제이크의 말이 왠지 모르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내 안에 차 있던 서러움과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크리스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듯 경찰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접 개입을 요청한 건 아니었지만,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 했다.
통화를 마친 그는 곧바로 수첩을 꺼냈고, 말투까지 형사처럼 변하며 하나씩 캐묻기 시작했다.
그들이 탄 차량, 번호판, 생김새, 장소, 시간...
기억나는 건 뭐든지 빠짐없이 말해달라고 했다.
크리스는 곧바로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인종차별을 당했던 그 장소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자 크리스는 마치 형사라도 된 것처럼 내가 입고 있던 얼룩진 티셔츠를 꺼내 들고, 바닥에 남아 있던 음료수 자국과 주변 풍경까지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겼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고, 문득 크리스의 눈빛이 진지함을 넘어서 약간 광기어린 느낌까지 풍기자, 나는 어느새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때만큼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
집에 돌아온 뒤, 우리는 거실 책상에 모여 앉았고, 크리스와 제이크는 몇 시간을 넘게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나의 사건 경위와 현장 사진들을 정리한 긴 에세이를 함께 작성해 학교의 학생 징계 위원회(Student Conduct Board)에 이메일로 제출했다.
마지막 문장을 보내고 나서, 셋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웃었고, 크리스와 제이크는 “We did it!” 하고 외치며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오늘 하루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분노와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 학교 측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CCTV 확인 결과, 내가 있었던 지점은 사각지대에 해당되어 가해자를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사과와 함께, 대신 학교 측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담은 메일을 모든 학생과 교직원에게 발송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정말로 “Important Message Regarding a Recent Campus Incident (학교 내 사건 관련 긴급 메시지)”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도착했고, 그 안에는 내가 겪은 사건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학교 규정상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또 만약 가해자가 확인된다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될 것인지까지 매우 단호하고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이메일을 열기 전까진 마음이 무거울 줄 알았지만, 막상 내용을 읽다 보니 통쾌했고, 심지어 살짝 웃음까지 나왔다.
크리스와 제이크 덕분에 이미 위로받았고,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다 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사건은 마무리되었고, 사건이 정리되던 그날 밤, 다시 한 번 이 모든 일을 떠올려보았다. 인종차별을 당했던 그 순간은 분명 아프고 수치스러웠지만, 그 일을 통해 내 곁에 어떤 사람들이 남아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묵직하게 울렸다.
그러고 보면, 낯선 땅에서 내 편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모든 일이 심지어 그 모욕까지도 이젠 조금은 감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