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국 상남자의 집에서 보낸 가을방학

by 김세원

ESL 수업에서 첫 번째 중간고사(midterm)를 보는 날이었다.
문법도, 독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단어만 보면, 머릿속이 꼭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험만 끝나면, 그토록 바라던 가을방학이었으니까.
단 삼일뿐이라 해도, 그건 내게 충분한 위로였다.

시험 전날 밤, 나는 책상에 앉아 단어장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제이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Hey man, what will you do this Fall Break?” (야, 이번 가을 방학에 뭐 할 거야?)
"I don’t have any plans." (아직 아무 계획 없어.)
내가 짧게 대답하자, 제이크는 환하게 웃으며 자기가 사는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
아마 내가 아파트에 혼자 남겨질까 봐, 일부러 그런 말을 해준 것 같았다.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okay!” 하고 대답했다. 제이크는 내일 학교에서 만나 바로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자며, 옷이랑 속옷은 3일치만 챙기면 된다고 했다. 따뜻해진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은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나왔다.
앞선 네 과목은 모두 5~10분 정도 일찍 마칠 수 있었고, 마지막은 쓰기(writing) 시험이었다.

수업 중 Dr. Nick이 자주 예시로 들던 주제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시험에 나올 것 같아 나는 여러 버전의 글을 미리 연습해두었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시험장에선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떠올리며,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써내려갔다.

시험지를 내는 순간, 결과도 괜찮을 것 같았고 기분도 한결 가벼웠다.
교실을 나서는 길엔 이제 뭐하고 놀까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이크와 만나기로 한 서점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익숙한 빨간색 트럭이 나를 픽업하러 다가왔다. 트럭에 힘겹게 올라탔다. 곧장 이름 모를 락 음악이 볼륨 끝까지 터져 나왔다. 차 안은 베이스 진동으로 둥둥 울렸다. 시험도 끝났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신나는 음악을 듣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마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듯, 스트레스가 하나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제이크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제이크는 내 영어 수준을 배려해 쉬운 단어를 써주었고, 어려운 단어나 물건 이름이 나오면 꼭 쉬운 영어로 다시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런 그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제이크는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은 이혼은 하지 않으셨지만, 서로 1시간 거리에서 따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처음엔 언젠가 다시 함께 살게 될 거라 믿었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법원에 남편 성을 이름에서 빼달라는 신청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순간, 제이크는 부모님의 관계가 이제 정말 돌아가기 힘든 거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나도 제이크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대신 조용히, 제이크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분명했다. 진심으로 제이크의 마음이 괜찮기를 바랬다.

문득,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이 제이크의 어머니 집일지, 아버지 집일지 궁금해졌다.
제이크는 아버지 집에서2일, 어머니 집에서 1일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왜 아버지 집에서 더 오래 있을 거냐고 묻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You'll see when we get there. That place is the real America.”

(거기 가보면 알게 될 거야. 거기가 진짜 미국이야.)

네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그때부터 길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는 자취를 감추고,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이 시작되었다. 타이어는 자갈과 흙먼지를 튕기며 비포장도로를 힘겹게 올랐고, 트럭은 점점 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길 양옆엔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중간중간엔 바위와 움푹 파인 웅덩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까 봐 조수석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어쩔 땐 제이크가 잠깐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다시 가속을 했고, 뒤바퀴가 허공을 헛돌며 흙먼지를 날리더니 트럭이 한쪽으로 살짝 미끄러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여기서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에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한참을 더 올라가자, 네비게이션이 목적지 도착을 알렸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집이 아니라, 녹슨 철조망과 커다란 팻말 하나였다.

“ WARNING: PRIVATE PROPERTY – TRESPASSERS WILL BE SHOT.”

(경고: 사유지 – 무단 침입자는 총격을 당할 수 있음)

팻말 아래에는 총알 자국처럼 보이는 구멍들이 몇 개 박혀 있었다.

제이크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더니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철조망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시골 남자였다.
키는 180cm를 훌쩍 넘었고, 어깨는 넓었으며, 팔은 통나무처럼 두툼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엔 잔먼지와 기름때가 그대로 묻어 있었고, 짧게 자른 머리 위에는 낡은 LA 다저스 모자가 깊게 누르고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청바지는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진흙이 마른 워크부츠는 바닥을 밟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를 냈다.

왼팔엔 희미한 독수리 문신이 있었고, 오른손은 쇠냄새가 날 것처럼 단단한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철조망 문을 한 손으로 밀어 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Y’all made it. That road’s still a mess, huh?”

(왔구만~ 오는 길 아직도 난장판이제이?)
목소리는 낮고 굵었으며, 짙은 남부 억양이 배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제이크 아버지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분은 한 손으로 내 손을 단단히 잡고,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You must be that friend from Korea. Jake talks 'bout ya a lot. Welcome, son.”

(니가 그 한국서 왔다는 친구여? 제이크가 맨날 니 얘기만 하드만. 잘 왔다이~)

짙은 남부 사투리는 아직 낯설었지만, 그 억양엔 거칠지만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진심 어린 그 한마디에, 마치 나를 아들처럼 반겨주는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무엇보다 인사할 때 전해졌던 그의 악력에서, 아버지다운 든든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장난스럽게 제이크를 향해 ‘네 아버지, 진짜 멋지시다’는 제스처로 엄지를 척 들어 보였고, 제이크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한 걸 알아챘는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제이크 아버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정말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2층짜리 통나무 집이었다.
나무로 빽빽이 둘러싸인 산속 깊은 곳, 그 한가운데에 고요하게 서 있는 집.
현실감이 조금 떨어질 만큼 미국스러웠고, 한편으론 '정말 여기서 자도 되나?' 싶을 만큼 낯설었다. 현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쪽에서는 짙은 나무 냄새와 장작을 때운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벽에는 사냥한 노루와 멧돼지를 박제한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래된 사슴 뿔 모양의 모자걸이와 손때 묻은 가죽 재킷이 자연스럽게 걸려 있었다. 거실 한쪽 벽에는 술병과 잔들을 진열해 놓은 작은 선반이 있었는데, 깔끔하진 않지만 누군가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모아온 느낌이 물씬 풍겼다. 버번, 위스키, 문샤인. 라벨이 바랜 병들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유리잔에는 먼지가 살짝 내려앉아 있었지만 어딘가 더 운치 있었다. 벽난로에는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었고, 불 옆의 낡은 가죽 소파는 푹 꺼져 있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해 보였다.
그 공간 전체가 거칠고 투박했지만, 이상하게 따뜻하고 정겨웠다. 바로 이런 곳이 제이크가 말하던 "The real America"인가 싶었다.

제이크 아버지는 거칠게 냉장고 문을 열더니, 병맥주 세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찬 칼로 툭, 툭, 툭 뚜껑을 거칠게 따더니, 나와 제이크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런 다음 무무심한 듯 툭 손짓하더니, 그는 우리를 조용히 2층으로 안내했다.

일인용 침대 두 개가 가지런히 놓인 방은, 예상보다 훨씬 아담하고 포근했다.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났고,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너무 좋아서 감탄을 연발했고,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이크 아버지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Lemme show you something else." (이것 말고 또 하나 보여줄라니까.)

그리고는 다시 성큼성큼 1층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창고처럼 생긴 방문을 힘껏 열었고, 안에서는 삐걱거리는 철문 소리와 함께 숨 막힐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거의 무기 전시장이었다. 크고 작은 사냥용 총들. 석궁까지. 그 순간 나는,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잠깐 착각했다. 바닥 한켠에는 총알 상자들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벽을 가득 채운 총기들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총기가 일상생활의 일부처럼 깊이 자리 잡고 었다.

제이크는 “여기선 사냥도 하고, 자기 보호도 총으로 한다”며, 이 문화가 가족과 전통처럼 이어져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곳 사람들은 총기 소유를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동시에 총기 사고와 범죄 문제로 사회가 크게 고민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런 투박하고도 강렬한 문화가 내게는 낯설고, 동시에 두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제이크 아버지는 무심한 듯 말하길, 자기는 사냥이 취미라며 집 뒤쪽에 사격 연습장도 만들어 놨으니 원하면 한 번 쏴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괜히 덜컥 겁이 났다.무기들도 낯설었고, 아무리 취미라고 해도 총은 쉽게 손댈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마당에서는 커다란 장작불이 피어올랐다. 제이크 아버지는 직접 사냥해온, 내 허벅지만큼 두꺼운 맷돼지 고기를 커다란 꼬챙이에 꿰어 직화로 구우셨다. 생고기를 장작불 위에 직접 굽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불 조절 따위는 없었다. 겉은 금세 까맣게 탔다. 하지만 제이크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냥 장작을 더 넣었다. 맹렬하게, 계속.

한 시간쯤 걸릴 거라며 중얼거리던 제이크 아버지는, 라벨 없는 파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셨다.

병 안에는 이름 모를 풀잎, 가지, 들과일이 둥둥 떠 있었다. 그 향은 생소했지만 매혹적이었다. 나는 제이크에게 그게 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I don’t even know what that is. And the scary part? I have no idea how strong it is.”

(나도 저게 뭔지도 모르겠어. 근데 제일 무서운 건, 도수가 얼마나 센지도 전혀 모른다는 거야)

몇 도인지도 모를 그 술을 마시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의 권유는 따뜻했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 술은 마시는 순간 목구멍을 불지르는 듯했지만, 신기하게 거부감이 없었다. 입 안에는 뭔지 모를 풀내음과 과일 향이 퍼졌고, 몸은 천천히 느슨해졌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세상이 아주 조금, 기울기 시작했다. 몇 잔 더 마셨던 것 같고, 겉은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속은 분홍빛 육즙이 흐르던 그 바비큐 고기를 맛있게 먹은 기억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웃었는지 울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선 방 안에 누워 있었고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겨우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그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말문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별들이 쏟아질 듯 촘촘히 박혀 있었고, 가로등 하나 없는 그곳에서 하늘빛만으로도 주변이 환했다. 풀벌레 소리는 온 마당을 가득 채웠고, 수많은 반딧불들이 빛을 내며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았던 반딧불은 형광색을 오래 발하며 천천히 날아다녔지만, 이곳의 반딧불은 마치 별똥별처럼 툭, 반짝이며 짧은 불빛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짧은 불빛이 수십, 수백 개가 동시에 반짝이니, 마치 땅 위에서도 별들이 반짝이는 듯했다.

하늘에서는 별이, 땅에서는 반딧불이.

나는 그 사이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제이크라는 친구를 만났다는 것.
그 모든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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