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e Fair와 작은 변화
제이크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치 오래된 보금자리로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했다. 자연스레 늘어지게 낮잠도 잤다.
저녁엔 교회 형들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제이슨 형이 "Fall Break 때 뭐 했어?"라고 묻는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말이 입에서 매끄럽게 나오지 않고, 말끝이 자꾸 엉켜버리는 낯선 버벅거림이 느껴진 것이다. 고작 사흘 동안 영어만 쓰고 지냈을 뿐인데, 다시 한국말로 이야기하려니 어색했다. 물론5분쯤 지나자 다시 자연스럽게 말이 풀렸지만, 그 짧은 순간은 꽤 충격적이었다. ‘한국말도 어색하고, 영어도 못하면 어떡하지?’
처음으로 낯선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내 영어 실력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가을 방학을 너무 잘 보내서일까. 학교생활에도 다시 활기가 돌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수업에 집중하며 공부에 힘을 쏟았다. 배운 표현들은 크리스나 제이크와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써보며 쏠쏠한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2주는 금세 지나갔다.
제이크 부모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 전날, 크리스가 내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그는 바람이 많이 불고 일교차도 심한 곳이라며, 추위를 많이 탄다면 겨울 패딩은 꼭 챙기라고 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패딩까지야 싶었다. 그래도 처음 가보는 곳이니 경험자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또한, 게임도 하고 먹을거리도 사 먹어야 하니 현금 30달러 정도는 꼭 챙기라고 했고, "Bring six five-dollar bills." (5달러짜리 지폐 여섯 장 가져와) 라며 지폐 단위까지 신신당부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는 "Let’s leave around 6 p.m. on Friday in my car." (금요일 저녁 6시쯤 내 차 타고 출발하자) 라고 말하며 약속 시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나와 제이크는 거실 소파에 미리 앉아 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크리스가 거실로 나왔다. 그는 말없이 보드카 샷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One shot before we go!” (가기 전에 한 잔 씩들 마시고 출발하자!)
하고는 원샷을 권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제이크는 무슨 뜻인지 이미 아는 듯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켰다.
나도 결국 머뭇거리다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고, 그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State Fair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기 10분 전쯤부터, 도로는 이미 수많은 차량들로 길게 막혀 있었다. 길가에는 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설렘이 도로 위까지 흘러나오는 듯했다. 크리스는 “Let’s take a walk.” (이제는 걸어자) 하고 말하며, 조용한 샛길로 차를 돌렸다. 그는 익숙한 눈빛으로 주차 자리를 찾았고, 한적한 구석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얼굴을 스치는 미세한 모래바람과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가 나를 덮쳤다. '지금이 겨울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패딩 속은 따뜻했고 마음도 들떴다. 아마도 아까 마신 보드카 한 잔 때문이었을까.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졌고, 세상의 모든 것이 즐거웠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 크리스의 모습에 든든했고, 어쩐지 조금 멋져 보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처럼 멀리 차를 대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친구, 연인, 가족들까지 모두들 축제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따금 웃음소리와 장난치는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 리액션들이 곳곳에서 튀었다.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 걸음엔 설렘이 가득했다.
제이크는 번갈아 제이크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서로의 위치를 알렸다. 입구까지 5분 정도 남았을 때쯤이었을까. 사람들 사이로 눈에 띄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몸만 한 인형을 들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대형 솜사탕 봉지를 들고 있었다. 특히 어떤 스페니시 아저씨는 커다란 비닐 안에 대형 인형 다섯 개를 가득 담아 어깨에 둘러맨 채, 약간은 지친 듯, 하지만 자랑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인상적이었다.
그때,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제이크의 어머니였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다가오셨고, 나와 크리스를 번갈아 안아주셨다. 그리고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농담도 잊지 않으셨다.
"You ready for some real American junk food today?"
(오늘 진짜 미국식 불량식품들 먹을 준비 됐어?)
나는 그 말에 과장되게 배를 움켜쥐고 "I was born ready!" (태어날 때부터 준비돼 있었지요) 하는 제스처로 응답했고, 어머니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리고 5분쯤 더 걸었을까. 멀리서 누군가 말끔한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곧 제이크 아버지라는 걸 알아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거칠고 투박한 인상과는 달리, 오늘은 깔끔하게 머리까지 빗으시고, 도톰한 재킷에 다림질이 잘 된 청바지, 그리고 광택이 나는 가죽 구두까지 갖춰 입으신 모습이었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오늘 하루를 기대하고 있었단 게 느껴졌다.
제이크 아버지도 우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셨다.
“Hi, my boys!” (아이고, 내 새끼들~)
그리곤 익숙하게 손바닥을 거칠게 마주쳤다. 투박한 손바닥의 감촉과는 달리, 오늘따라 차려입은 모습이 유난히 단정해 보여서 순간적으로 어색한 이질감이 스쳤다. 그래도 그 손길에는 진심 어린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제이크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선이 살짝 마주쳤다. 두 분 모두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짧은 눈맞춤 외엔 별다른 말을 주고받진 않았다
서로 반가움을 충분히 나눈 뒤, 우리는 함께 State Fair 입구로 들어섰다. 입장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로 북적였고, 바닥은 모래가 섞인 흙이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살짝씩 피어올랐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조명이었다. 공간을 비추는 가로등은 몇 개 되지 않아 전체적으로 어스름했지만, 그 어둠 속에서 놀이기구와 음식 부스, 게임장, 그리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각자의 불빛을 밝히며 환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수많은 작은 빛들이 어두운 밤을 수놓듯 반짝였고, 그 덕에 이 넓은 공간은 오히려 더 따뜻하고 활기차게 느껴졌다. 각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장르도 리듬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모든 소리들이 어우러져 마치 커다란 축제의 심장처럼 거리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행사장을 넘어서, 어른들도 아이처럼 웃고 떠들 수 있는 커다란 놀이터 같았다.
제이크 아버지가 허리춤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시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외치셨다.
“I’m blowing all this money today!” (오늘 돈 좀 시원하게 다 써뿔 거시다)
제이크와 크리스는 환호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나는 유교 나라에서 온 한국인답게, 어른 돈을 함부로 쓰는 게 맞는 건가 싶어 어정쩡한 표정만 지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본 제이크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Everything we eat here is on me. I made a deal with YooSeok.”
(오늘 여기서 먹는 건 전부 내가 쏘기로 유석이랑 얘기 끝났어)
이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두 분 다 뭔가 작정한 표정이셨고, 그 진심이 고맙고 귀엽게까지 느껴져서 우리 셋은 7살짜리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두 분도 흐뭇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유난히도 불빛이 많고, 음악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놀이기구 구역이었다. 멀리서 봐도 번쩍이는 조명과 사람들의 환호성에 마음이 먼저 끌렸다.
처음엔 놀이기구들이 우리가 아는 대형 놀이공원처럼 거대하거나 세련된 느낌은 아니었고, 오히려 약간 촌스럽고 아기자기했다. 그래서 솔직히 ‘이게 재미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직접 가까이 가보니 그 생각은 금세 바뀌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고, 소리를 지르며 놀이기구를 즐기는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제이크 아버지가 벌둥벌둥 주위를 둘러보며 감만 잡고 있던 우리 셋에게 현금을 쥐여주며 말했다.
“Go grab some ride tickets!” (놀이기구 티켓 좀 얼른 챙겨와봐)
티켓 부스에 가니 놀이기구마다 다르지만 보통 한 번 타는 데 3장 정도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었다. Ride ticket은 한 장에 1달러. 우리는 총 30달러를 내고 30장의 티켓을 샀다. 그리고 제일 먼저 선택한 건, 눈에 띄게 인기가 많았던 바이킹과 미니 롤러코스터였다.
바이킹은 생각보다 작았고, 출발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별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타고 나니 이야기가 달랐다. 출발과 동시에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좌우로 흔들릴수록 비명을 질렀다. 제이크와 크리스도 내 옆에서 같은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즐기고 있었다. 작다고 얕봤던 롤러코스터는 예상보다 스피드감이 있었고, 짧지만 순간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짜릿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두 개만 탔는데도 이미 목이 쉴 정도였다.
남은 티켓으로는 5명이 다 함께 탈 수 있는 SkyGazer라는 대형 관람차를 골랐다. NC State Fair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관람차는 무려 47미터 높이의 이동식 구조물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이동식 관람차라고 했고, 수십만 개의 LED 조명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 하나의 별이 떠 있는 것처럼 빛났다.
우리는 한 칸에 나란히 앉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관람차가 점점 높아질수록 아래에 펼쳐진 축제 풍경이 작고 아름답게 보였다. 조명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뿌연 먼지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군데군데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몽환적으로 퍼졌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다들 조용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이 올라온 관람차 안에서, 그 밤의 정취와 공기,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했다. 누군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될 거란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먹거리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축제 특유의 기름 냄새와 웃음소리, 튀김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옥수수 버터 향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음식들이 뭔가 달랐다. 전부 다 튀겨졌다. 그리고 전부 다 거대했다. 덩치가 제법 있는 흑인 아저씨가 팔뚝만 한 칠면조 다리를 들고 한입 베어무는 모습은,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막 튀어나온 장면 같았다.
한쪽에선 사람 키만 한 솜사탕이 팔리고 있었고, 다른 쪽엔 ‘딥 프라이드 피클’, ‘딥 프라이드 콜라’, ‘딥 프라이드 마시멜로’ 같은 간판들이 정신없이 번쩍였다.
진짜였다. 말 그대로 피클을 튀기고, 콜라를 튀기고, 마시멜로까지 기름에 풍덩 담가 파는 곳이었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겠다’는 말이 실제로 실험되는 공간이었다.
그때, 제이크 어머니가 조용히 가방을 여시더니 현금을 꺼내며 말했다.
"Make sure to try one of everything. Today’s the day for that."
(하나씩은 다 먹어보는 거야. 오늘은 그런 날이니까)
크리스와 제이크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고, 어느새 우리 셋은 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메뉴판에는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Deep-Fried Butter.’ (버터 튀김)
순간, ‘버터를 튀긴다고?’라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기름에 싸서 기름에 튀기는 음식이라니.
만드는 과정을 보니, 정말이었다.
버터 한 덩이를 반죽에 싸서 나무꼬치에 꽂고, 뜨거운 기름 속으로 풍덩.
믿기지 않았지만, 결국 내 손에도 하나가 쥐어졌다.
조심스럽게 한입.
겉은 바삭했고, 안에서는 녹아내린 버터가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짭조름하고 고소했지만, 느낌은 마치 핫도그 빵 안에 녹인 버터 반 컵을 부어 놓고 먹는 기분이었다.
한 입으로 충분했다.
기름에 튀긴 기름이라는 자각이 드는 순간, 더는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표정을 본 크리스와 제이크는 깔깔대며 웃었고, 이번엔 또 다른 줄로 나를 데려갔다.
“Deep-Fried Oreos! These are seriously good.” (오레오 튀김! 이거 진짜 맛있어)
“And the deep-fried Garlic Ice Cream too. That’s real American style.”
(마늘 아이스크림 튀김도 먹어야지. 이게 진짜 미국식이지)
이미 위장은 항의 중이었지만, 두 사람의 기대 어린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딥 프라이드 오레오는 예상보다 훨씬 고소하고 달콤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녹아 있는 오레오의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딱, 진한 호두과자 느낌이었다.
그다음은 마늘 아이스크림 튀김, 설명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달콤한 크림 속에 스며든 마늘 특유의 알싸함.
짜고, 달고, 고소하고... 도대체 왜 맛있지? 싶은 혼란 속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은 제이크 아버지의 강력 추천이었다.
“Elephant Ear and Krispy Kreme Cheeseburger are a must. No way we’re skipping those!”
(엘리펀트 이어랑 크리스피 크림 치즈버거는 꼭 묵어야제~ 안 묵고 지나가믄 섭하지)
엘리펀트 이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줄을 서며 슬쩍 지켜보니, 피자 도우 같은 반죽을 대형 튀김기에 짜 넣어 튀기고 있었다.
기름 위에서 부풀어 오른 그 모습은 정말로 코끼리 귀처럼 넓고 납작했다.
다 튀긴 반죽 위에 슈가파우더, 시나몬, 버터, 잼까지 수북이 얹어 접시에 담아 주었다.
바삭한 겉면 아래로 퍼지는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
잘 만든 팬케이크에 시나몬 설탕을 뿌려 먹는 맛.
짜증날 정도로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전한 건 크리스피 크림 치즈버거.
햄버거 패티와 치즈, 베이컨 사이에 달달한 도넛이 번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문 제이크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쳤다.
“This one’s the real winner today.” (이거이 오늘 진짜 1등이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도넛 버거를 집어 들었지만, 이미 위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중이었다. 입 안에 넣자, 단맛과 짠맛, 육즙과 설탕이 한데 엉켜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도넛 버거 역시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맛있어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초고칼로리의 위협이 온몸을 덮친 듯한 충격 때문이었다.
배가 불러 허리춤을 느슨히 잡은 채, 우리는 실내 체육관처럼 생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의 튀김 파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바닥은 톱밥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농산물과 동물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말 그대로 State Fair의 본래 모습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처음엔 배도 부르고 기름 냄새도 가셔서 무심히 지나가려 했는데, 예상 외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마트에서 늘 보던 호박이나 고구마, 양파, 브로콜리 같은 채소들이 죄다 내가 아는 것보다 다섯 배는 컸다. 거의 몬스터급이었다.
특히 한 호박 앞에선 발이 절로 멈췄다.
‘1st Winner – Giant Pumpkin’ (1등 – 초대형 호박) 이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는데, 크기가 정말 사람이 두 명은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 어마어마한 사이즈가 눈앞에 펼쳐지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제이크는 매년 크기, 품질, 색깔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일등을 뽑고, 상품과 상금까지 준다며, 이게 생각보다 꽤 치열한 경쟁이라고 귀띔해줬다.
그 옆에는 살아 있는 동물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송아지, 염소, 돼지, 양, 토끼, 심지어 거대한 칠면조까지 우리 안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이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었고, 공간 전체에 따뜻한 분위기가 번졌다.
전시 구역을 지나 걷다 보니, 사방에서 익숙하면서도 촌스러운 소리가 퍼져 나오는 곳이 나타났다. 바로 게임장 구역이었다. 플라스틱 총으로 오리 인형을 맞추는 사격장, 바구니에 공을 던지는 농구 게임, 물총으로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 그리고 뽑기 게임까지.
이곳은 온통 반짝이는 불빛과 과장된 진행 멘트, 그리고 사람들의 아쉬운 탄식과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제이크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That’s the hardest game here. No one ever wins that basketball one unless you’re LeBron.”
(여기서 저게 제일 어려운 게임이야. 르브론 정도 돼야 이기지, 보통 사람은 택도 없어)
실제로 농구골대는 이상할 정도로 작고 높았고, 공은 바운스도 제대로 안 되는 낡은 고무공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Just one more shot!’ (딱 한 판 더!)을 외치며 10달러를 계속 바꿔가며 도전하고 있었다. 그 끈질김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나와 제이크는 몇 가지 게임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야심 차게 공을 던지고, 고리도 던져봤지만 인형 하나 건지지 못한 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제이크 아버지가 말없이 지갑에서 5달러를 꺼내들고는 BB탄으로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장 앞으로 걸어가셨다.
“Watch this” (지금부터 보여줄게)
자신 있다는 눈빛이었다.
아버지는 자세를 낮추고 총을 들어 조준했다.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곧 이어 연달아 방아쇠를 당기셨다. 뻥, 뻥, 뻥!
순식간에 열두 개의 작은 풍선들이 차례로 터졌다.
우리는 동시에 “wow!” 하고 환호성을 질렀고, 손바닥을 마주쳐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은 제이크 아버지를 향해 “That was epic!” “You’re a legend!” (진짜 대박이야! 완전 레전드야!) 같은 말을 던지며 신나게 들떴다.
게임장 직원은 웃으며 커다란 오리 인형 하나를 건넸다. 인형은 거의 사람 크기만 했고, 노란 털이 복슬복슬하게 빛났다. 아버지는 양손에 인형을 들고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셋을 한번씩 바라보시더니, 말없이 인형을 어머니 쪽으로 툭 내밀었다.
제이크 어머니는 싫은 척 하며 고개를 젖혔지만, 두 손으로 인형을 꼭 받아 안으셨다. 인형을 꼭 안고 있는 그 모습은 꽤 정감 있었고, 나와 제이크, 크리스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Yes!” 하고 소리쳤다.
시간이 어느새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축제장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고, 가슴속에 오래 남을 추억을 안은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제이크가 밝은 얼굴로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Hey, got some news. Mom invited Dad to Thanksgiving this year.”
(있잖아, 소식 하나 있어. 엄마가 올해 추수감사절에 아빠를 초대하셨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이크는 이어서 말했다.
“First time in five years, man. It’s kind of a big deal.”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야. 꽤 의미 있는 거라고)
그는 마치 아이처럼 들떠 있었고, 그 말 속엔 기쁨과 뭉클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내가 인종차별로 힘들어할 때, 늘 내 곁에 있어 준 제이크에게 작게나마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빚을 갚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날 State Fair에서의 작은 기회와 웃음들이, 어쩌면 아주 천천히 이 가족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