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족이 되어간 하루

가족이 되어간 하루

by 김세원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속이 메스껍고 쓰려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며 아직 조금 살아 있는 장작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느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방 쪽에서 베이컨과 계란 굽는 냄새가 퍼져왔다. 눈을 뜨니 제이크와 아버지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제이크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넸다.

"You were hilarious yesterday." (너 어제 진짜 웃겼어)
그가 휴대폰으로 보여준 영상 속 나는,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까지 붉게 상기된 채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Freedom! ~” (해방이다!~)
카메라 속의 나는 마치 세상의 중심이라도 된 듯, 소리치고 있었다. 처음엔 웃음이 났지만, 곧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순간, 제이크 아버지가 냉장고에서 그 파란색 술병을 꺼내 드는 걸 보는 순간, 내 속에서 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어젯밤 먹은 모든 것을 토해냈다.

제이크 부자는 뒤따라 나와 물과 휴지를 건네주며 큭큭 웃었다. 부끄러운 순간이었지만, 그 웃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속이 비워지자 마음도, 몸도 한결 편해졌다. 이 낯선 곳이 조금은 덜 낯설게 느껴졌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오니 제이크와 그의 아버지가 사냥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기 허가증이 있는 제이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라이플을 닦고 조립하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벨트에 칼집을 고정하고 탄띠를 매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제이크 아버지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Here, you’ll need this.” (자, 이거 가져가. 곧 쓸 일 있을 거여~)
그것은 무겁고 납작한 날을 가진 마체테, 정글칼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서나 보던, 덩굴을 자르고 길을 트는 데 쓰는 묵직한 칼. 두 손으로 쥐었을 때 약간 중심이 쏠릴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지만, 허리춤에 가죽 벨트로 고정하니 어쩐지 나도 오늘의 사냥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크 아버지가 두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자, 리트리버 세 마리가 동시에 짖으며 뒷산 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올라갔다.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며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산속으로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잔가지와 덤불이 어깨 높이까지 자라난 구간에서는 개들이 지나간 길이 겨우 희미하게 보였고, 그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끔 가지가 얼굴을 때릴 정도로 복잡하게 엉켜 있을 때면, 나는 허리춤에서 마체테를 꺼내 들고 단숨에 휙 하고 휘둘렀다. 생각보다 손에 착 감기고, 잘 들었다.
"That's so cool!" (완전 대박인데!)
제이크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이 미국 시골의 거친 풍경 속에서, 내가 어딘가 어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시간 쯤 지났을까, 멀리서 리트리버 세 마리의 짖는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제이크 아버지의 걸음이 바빠졌고, 우리 셋은 말없이 짐작된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제이크 아버지가 손을 들어 우리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손끝 하나, 발소리 하나에서도 사냥꾼의 집중이 느껴졌다.

그가 조심스레 라이플을 들어 정조준하더니, 짧고 무겁게 탕!

순간, 풀숲 어딘가에서 철퍽 하고 큰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수풀 사이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털이 햇빛에 반짝였고, 고요한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제이크와 그의 아버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총을 내려두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고라니가 숨이 끊겼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정부에서 발급받은 사냥 태그를 귀에 부착했다.
그 다음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제이크 아버지가 칼을 꺼내 고라니의 배를 갈랐다. 피가 쏟아지고, 내장이 천천히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은 너무도 생생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잔인하다기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죽음으로 바뀌는 그 경계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었다.

약 30분 정도가 지나자, 고라니의 피는 대체로 빠졌고, 잘 정리된 내장은 나무 아래에 조심스레 놓였다. 그들은 빠르게 주변을 정리한 뒤, 제이크 아버지가 앞발 두 개, 뒷발 두 개를 각각 손에 쥐고, 어깨에 고라니를 척 걸쳤다.
흠뻑 젖은 셔츠 아래로 울퉁불퉁한 팔 근육이 드러났고, 그가 "Time to go back." (슬슬 돌아가자) 라고 말하며 앞장서 걸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게 진짜 상남자라는 거구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이크 아버지는 뒷마당으로 향했다. 뒷마당 한쪽엔 굵은 쇠고리가 매달린 낡은 나무 기둥이 있었고, 거기에 오늘 잡은 고라니를 척 하고 걸어 올리셨다. 가죽을 벗기는 손놀림은 거칠지만 익숙했고, 피와 털이 천천히 벗겨지며 붉은 살점이 드러났다. 나는 제이크 옆에 서서 시원한 콜라를 들고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처음엔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잔인하단 느낌보단 인간이 자연 앞에서 취하는 본능적인 태도처럼 느껴졌다.

잠시 뒤, 커다란 나무 도마 위에 고라니 고기가 올려졌다. 제이크 아버지는 묵직한 칼로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내셨다. 자른 고기들은 지퍼백에 대충 나눠 담겼고, 그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에 한 덩이 고기를 들더니 우리 앞에 툭 내려놓았다.

“How about some backstrap steak tonight?” (오늘 저녁에 백스트랩 스테이크나 한 판 구워 묵을까?)

'Backstrap'이 뭔지 몰라 멀뚱히 제이크를 쳐다보자, 휴대폰을 꺼내 검색 결과를 내밀었다.
“등심 중에 제일 부드럽고 육즙 많아서 스테이크로 많이 쓰이는 부위”라고 적혀 있었다.

제일 부드럽고 맛있는 부위라는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이크는 그 살코기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기름을 바르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냉장고에 넣었다. 우리는 해가 지길 기다리며 낚시를 하러 연못으로 향했다. 비록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그늘에 걸린 해먹에서 낮잠을 자고, 연못에 다이빙해 수영도 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 제이크 아버지는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그 위에 무쇠 불판을 툭 올렸다. 버터 한 덩이를 녹인 뒤, 낮에 재워둔 고기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기름이 고기 겉면을 감싸며 치이익 소리를 내자, 고소한 냄새가 마당을 가득 메웠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제이크 아버지가 잘 익은 고기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넣어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기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고, 소고기보다 기름기 적고 쫀득하면서도 풍미가 깊었다. 살짝 야생의 냄새가 스쳤지만, 버터와 로즈마리 향이 그걸 잡아주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Thank you so much for inviting me. I’ve never felt the real America like this before!”

(초대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진짜 미국을 느껴본 건 처음이에요!)

내가 감격스레 말하자, 제이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말했다.

“How about we go to the State Fair in two weeks?” (우리 2주 뒤에 주 박람회 한번 가볼래?)

그 말에 제이크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긴 꼭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 순간, 제이크 아버지의 눈빛에서 뭔가 말하지 못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레 제이크에게 물었다.

“Do you think your dad could come with us too?” (혹시 너희 아버지도 같이 오실 수 있을까?)

제이크는 살짝 당황했지만, 아버지의 미묘하게 밝아진 표정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Sure.” (당연하지)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제이크 아버지는 진짜 비싼 술이라며 꼬냑을 꺼내오셨다. 전날의 그 파란 술 악몽이 떠올라 처음엔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제이크 아버지가 “진짜 가족이 된 기념”이라는 그 한마디에, 결국 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어느새 우리는 병 하나를 다 비워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제이크 어머니 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전날 마신 술 덕분에 속이 뒤집혀 있었고, 제이크는 트럭에 탈 때 내게 커다란 빈 바구니를 안겨주었다. 이동 중 멀미를 할까 봐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중간중간 몇 번 속을 비워낸 뒤, 겨우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우리는 이미 제이크 어머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속으로는 ‘오늘은 절대 술 안 마신다’고 굳게 다짐하며 트럭에서 내렸다.
제이크 어머니의 집은 우리가 이틀 전까지 머물던 산속 통나무집과는 달랐다. 그저 평범한, 미국 교외에 흔히 있는 2층 주택이었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일상적으로 보여서, 오히려 그 이틀간의 경험이 꿈처럼 느껴졌다.

현관문 앞에는 이미 제이크 어머니가 나와 계셨고, 따뜻한 미소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품은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을 만큼 포근했고, 마치 진짜 어머니의 품 같았다.

어머니는 우리가 편하게 쉬길 바라는 듯, 불필요한 질문도 간섭도 없으셨다.
덕분에 나는 제이크 방에서 조용히 두 시간가량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일어나보니, 따끈한 라자냐 한 접시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건 내가 알던 라자냐와는 조금 달랐다.
치즈 대신 바삭하게 구운 콘브레드 같은 토핑이 윗면을 덮고 있었고, 숟가락으로 퍼내자 그 안엔 다진 고기, 콩, 피망, 치즈, 그리고 토마토소스가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첫 입에 퍼지는 짭짤하고 구수한 맛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정말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제이크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도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다음엔 나에게도 꼭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How about I make dinner tonight?" (오늘 저녁은 제가 한번 만들어도 괜찮을까요?)

처음엔 극구 사양하셨지만, 내가 진심으로 뭔가 보답하고 싶다고 하자 제이크도 어머니도 미소를 지으며 기대된다고 말했다.

점심을 먹고 뭘 만들까 고민하던 중, 35분 거리에 H마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제이크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한국식 돼지갈비와 쌈채소, 비빔밥 재료, 그리고 한국 과자와 막걸리까지 구입했다. 속으로는 다 내가 만든 것처럼 연기할 작정이었다.

저녁이 되자, 일부러 소량씩 작은 접시에 나눠 담아 식탁을 가득 채웠다.
제이크와 어머니는 정말 고급 한식당에 온 것 같다며 사진도 찍고 박수도 쳐주셨다.
나는 쌈을 싸는 법, 비빔밥을 비비는 법, 막걸리는 어떻게 마시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며 대접했다. 제이크 어머니는 야채를 이렇게 맛있게 먹을 줄 몰랐다 라며 감탄했고, 레시피를 묻길래 영수증을 꺼내 보여드리며 솔직하게 H마트에서 산 거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그 솔직함마저 귀엽다며 웃으셨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중, 제이크 어머니가 물었다.
"Do you have any special plans this month?" (이번 달엔 어떤 계획 세워놨어?)

제이크가 무심히 말했다.

"In two weeks, dad, Chris, and I are going to the State Fair."

(2주 후에 아빠랑 크리스랑 저, 이렇게 셋이서 주 박람회 가기로 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 어머니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나도, 제이크도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부모님 사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Mom, come to the State Fair with us!" (어머니도 우리랑 같이 주 박람회 가요!)

그 말을 던지자마자, 제이크와 어머니의 눈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어머니는 잠깐의 정적 끝에 장난스럽게 외쳤다.
"Alright, I’ll show you what real American junk food is!"

(좋아, 미국식 불량식품을 제대로 한 번 구경시켜줄게!)

제이크는 환하게 웃었고, 나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순간, 우리 셋 모두 말은 없었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정말 가족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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