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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의 의미, 꿈과 현실의 간극

22년 차 맞벌이, 20년 차 워킹맘 이야기

by 조여사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는 동안 힘든 일이 있었을 때, 궁금한 게 있을 때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친구들 중에서도 빨리 결혼한 편이었고 회사에서 아기 낳고 출산휴가 다녀왔다가 복직한 첫 여직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0살이 되고 은퇴 후의 삶이 격하게 다가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 내가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아버렸습니다. 조금은 화가 나고 조금은 슬프게도 내가 아기 낳고 회사를 다니며 했던 걱정들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다들 고민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기를 살아가던 삶이란 것은 항상 질문거리를 던져줍니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언제나 다사다난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지난해 회사일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던 8월부터 9월, 그리고 폭풍물욕을 보내던 10월을 지나 이제는 조금 안정된 마음가짐으로 11월을 보내고 싶었지만 11월도 다사다난했네요. 그리고 12월부터는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다사다난함을 느끼고 있죠.

10월 29일은 아들 생일, 11월 7일은 딸 생일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10월 말 법인인 회사에서 제일 바쁠 때 두 번의 출산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둘째 임신했다고 했을 때 내 앞에서는 꾹꾹 참던 같이 일하는 동료가 상사한테는 그걸 두 번은 못하겠다며 퇴사하겠다고 소리 질렀던 일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함께 근무하며 이제는 끈끈한 전우애가 생긴 그 친구에게는 항상 미안함 마음이 있습니다.

10월 29일 아들 생일을 잘 보내고 딸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열이 난다길래 병원에 다녀오라 하고 약을 먹는데도 열이 안 떨어져서 월요일에는 다시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꼭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은 화요일 학교에서 아프면 조퇴하라고 당부를 했죠. 그리고 화요일 오전,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아이의 말에 조퇴하고 병원에 가라고 하고 근무를 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폐렴이 의심되니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의료대란인 와중에 가능한 병원 몇 개를 알려주셔서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가보니 역시나 폐렴. 하지만 입원은 권하지 않는다고요. 옆에 딸보다 더 심한 환자들에게 병실이 없다고 말하는 걸 들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주에 회사감사기간이 겹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남편이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외래진료를 갔는데 결국은 입원이 결정되었습니다. 퇴근하고 아이한테 잠깐 아이에게 들렀다가 병원에서 잘 요량으로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니 아이는 씩씩하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괜찮다고 합니다. 아직은 소아청소년이라 다행히 소아병동에 입원한 덕분에 엄마가 없다고 더 신경 써주시는 간호사분들이 계셔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금요일과 토요일 씩씩하게 있던 아이는 일요일 저녁, 지쳤는지 엄마가 병원에 있어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네요.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혼자서도 충분히 동네 병원을 가야 할 나이이긴 하지만 이렇게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로 아플 때 엄마로서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건 언제나 마음이 아픕니다.


저의 어렸을 때 꿈은 우습게도 현모양처였습니다. 당시 주변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볼 수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주변에서 친근하게 볼 수 있는 어른 여성은 엄마였고, 제 눈에 저희 엄마는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뜰히 살림을 하며 아이 교육에 진심을 다하시는 현모양처로 보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요리에 취미가 생겨 다양한 베이킹 수업을 들으며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맛있는 것을 많이 만들어줘야겠다 생각했죠. 저를 아는 제 친구들은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회사를 다닐 줄 몰랐다고 놀라워합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 둘을 이렇게 키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수많은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이 쌓여왔습니다. 이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현모양처의 꿈을 저 멀리 던져버렸지만, 그 과정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기쁨은 모두 소중한 경험이 되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삶은 끝이 없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나누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걸으며, 알지도 못한 사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힘을 얻는 그런 관계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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