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타워 37F, 예고에 없던 비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간은 퇴근이 30분 정도 남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조용히 흐른다. 마시던 찻잔을 들며 슬며시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본다. 창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 넘어 일렁이는 서울의 풍경과 테헤란로의 불빛들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가끔 시간을 되돌려 달려가 보는 깊이 각인된 순간들이 있다.
‘아, 지루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길 건너 건물에서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친한 동생 B에게 전화를 했다.
“콜! 비 오잖아!”
혹시 몰라 우산을 챙겨 왔다는 그녀는 15분까지 로비로 데리러 가겠다며 시간 맞춰 내려오라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골드 버튼이 반짝이는 블랙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목으로 살짝 올라온 화이트 셔츠 깃 덕에 얼굴은 화사해 보인다. 샤넬 클래식 백을 메고, 혹시 몰라 챙겨 나온 그레이 스카프를 어깨에 두른 채 팔짱을 낀다. 블랙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잔걸음으로 그녀를 기다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지겨워! 비올 줄 알았으면 핑크색 스카프를 챙겼을 텐데!‘
빌딩숲 사이로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물웅덩이가 하나둘씩 늘어난다. 찰랑찰랑 물방울을 튀기며 걷는 무거운 발걸음은 불편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삶이 불만족스럽고 답답해질 때마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나를 키우고 바로 세우는 시간은 사라져 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하루는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며 따분하기만 했다. 온 힘을 다해 노력해 온 길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잠시 멈춰야 하는지, 섬세하게 방향을 틀어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 뛰는 삶을 향해 열지 못했던 문 앞에서, 가지 못했던 길목에서 꽁꽁 얼러붙은 서른을 맞이했다.
<적과 흙>은 1830년에 출간된 스탕달의 장편소설이다. ‘적과 흑’은 말 그대로 붉은색과 검은색을 의미하는데, 당시 프랑스 계급에서 적은 군복을 상징하고, 흙은 사제복을 상징한다. 그 시대의 평민은 수도사가 되는 것 외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딱히 없었고, 주인공 쥘리엥 소렐도 성직자가 되기 위해 레날 시장의 자녀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된다. <적과 흙>은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한 젊은 청년의 꿈과 야망을 통해 당시 지배계층의 비윤리적이고 비이상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의미가 크지만, 나는 성공을 위해 파리로 상경한 ‘쥘리엥 소렐’은 ‘지루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구나 하고 이 작품을 기억한다. “아, 지루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이 한마디. 우연히 공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나도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다. 주어진 일을 해내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하루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말이겠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꿈에 대한 초라함과 사회와 타인의 기준에 맞춘 밥벌이 만을 위한 선택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황량함과 굴욕감이 뒤 썩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건강한 질문과 여유가 부재했던 내 청춘은 경제적 안정감과 독립을 향해 불안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맞춰서 살아가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면 삶도 변한다. 좀 느리게 가더라도 바르고 가지런히 나아가 보자는 마음의 움직임은 ‘아, 지루해’로 정의되어 버린 나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로 채우기 시작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위치한 작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 서른 즈음이었다. 거장들의 전시회가 있을 때면 미리 예매해 미술관을 찾았고, 작은 갤러리를 둘러보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도록을 감상하는 것은 삶의 의식처럼 지속되고 있었다. 도파민 주사를 맞은 것처럼 감정을 즉각적인 희열로 빠져들게 만드는 기적 같은 힘에 몰입했고, 내 안에서 일렁이는 잔잔한 파도의 정체를 파고들었다. 인적 드문 회랑을 거닐며 고귀한 그림과 마주하고, 나와 나누는 기쁨과 슬픔의 대화는 느슨하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접속하는 기분이었다. 회사일은 지루하게 바빴고, 대학원 석사 논문을 준비하며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림으로 삶의 공백은 여유를 찾기 시작했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며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대신 조금 더 멀리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넓고 아늑한 화실 한편에 원목 이젤과 동그란 의자 그리고 스케치북과 연필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수업은 원장님과 짧은 담소를 나누고 선긋기부터 시작했다. 가로 세로 선긋기만 반복한 지 30분이 흘렀다.
“와, 그림 가르친 지 15년 동안 이렇게 선긋기 하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그림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엄청 기대되는데요!”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한 회원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진 사람의 가식적인 목소리치곤 상냥한 설렘과 들뜸이 썩인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따라 스케치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심히 그었던 가로줄과 세로줄, 가로와 세로로 나란히 선을 긋고 더 이상 그을 자리가 없어서 사선으로 긋고, 또 각도를 비틀어서 사선으로 선을 그었다. 나도 모르게 그었던 선들이 음영을 만들고 비영속적인 패턴을 만들어 내가 보기에도 꽤 근사한 예술작품으로 보였다.
‘그래, 나 꽤 잘 그렸다고!’
소묘부터 정물화 그리고 아크릴화까지 다양한 작품에 도전했고, 마포로 이사를 한 후 화실도 홍대 근처로 옮겨 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붓의 터치와 물감 텍스처의 쫀쫀함에 빠져 하얀 캔버스를 채워갔다. 알록달록 다채로운 물감으로 물든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은 앞치마의 주머니에 무심코 찔러 넣은 채, 8호 붓의 뒤 꼭지를 입술로 베어 물고, 15도 각도로 비스듬히 캔버스를 응시하는 내 모습을 나는 얼마나 상상했던가! 하얀 캔버스를 가득 채운 붉은색 장미가 생생하게 살아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붓의 터치와 예민한 감각이 필요한지, 공들인 시간만큼 장미빛깔은 자연스럽게 현실 속으로 스며든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세상의 잡음과 기준에 휘둘려 삶의 확신을 잃어갈 때, 캔버스 위 거침없는 붓터치로 나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색으로 캔버스가 채워지듯 손짓과 호흡의 리듬은 마음속의 응어리를 하나씩 해체시켜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여 갔다.
내가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내 꿈은 자유롭고 우아하게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는 거라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매일 아침 30분 정도 일찍 등교하여 교탁에 놓인 아그리파 석고상을 그리게 하셨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함께 ‘쓱싹쓱싹’ 연필과 지우개로 고요히 시작하는 아침은 처음으로 예술이 내 삶에 스며드는 경건한 기쁨의 순간이었다. 교실 책상은 드문드문 자리를 채웠지만, 나는 매일 아침 일찍 등교를 했고, 한 분단을 옮기기 전, 일주일 동안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조금 더 일찍 등교했던 날도 있었다. “잘 그렸네! 점점 실력이 느는구나!” 선생님의 한마디에 고양된 나는 다양한 각도의 아그리파로 가득 찬 스케치북을 들고 집으로 냅다 달려갔다. 현관에 가득 찬 신발만큼 집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병세가 갑자기 악화된 할머니를 찾아온 친척분들로 집안의 아늑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조용히 책장에 스케치북을 밀어 넣고, 거실구석 음료 박스에 들어있던 오렌지 주스 캔을 들고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중학교 1학년때 내 짝꿍은 미대를 목표로 방과후면 매일같이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검정 화구통을 폼나게 메고 다녔던 짝꿍은 나의 절친이 되었고, 그녀는 내가 자기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자유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미술시간에 미술책 한 페이지에서 발견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따라 그렸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나는 사생대회에 나가서 동상을 받았다.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가’라는 생각을 하기엔 나의 불행을 스스로 돌보고, 스스로 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던 장남이라는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던 할머니, 어쩔 수 없는 고부간의 갈등과 상처받은 어머니, 독립하지 못한 삼촌과 고모와 함께하는 비대한 가족 안에서, 언제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참아야 하는지, 어떻게 마음을 숨기고 웃어야 하는지 예민하게 터득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정적이며 인자하신 아버지 어깨의 무거운 짐과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표정에 나는 자연스럽고 빠르게 성숙했고, 학교에서 그렸던 그림조차 보여드린 적이 없었다. 꿈은 꿈속에서만 실현되었고, 나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시간조차 스스로 방치해 버렸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설명할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나의 30대는 느리게 흘러갔다. 어쩌면 나는 꼭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보다는 “내 꿈은 화가야!”라고 누구의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 애교 부리며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아이고, 우리 딸 너무 잘 그렸네! 화가해도 되겠어!”라는 엄마, 아빠의 세심한 관심과 따뜻한 칭찬 한마디가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전투적으로 그림을 그린 후 몇 해가 지나고, 홍대의 아트카페에서 지인분들과 함께 일주일간 전시회를 개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우아하게라’라는 삶의 수식어라는 사실이 온 마음을 평정했다. 시련과 좌절을 통과해 맹목적으로 동경한 삶의 성취가 잿빛의 공허함만 남겼을 때, 진짜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