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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Y Sep 27. 2024

나이 들어가고 있습니다만,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내가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참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가끔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회사 후배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저도 언니처럼 늙고 싶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어필된 나의 매력이 있구나! ’  좋게 생각하려 했지만,  프로예민러에겐 그냥 넘길 수 없는 디테일이 있다. 일순간 미간이 찌그러졌고, 기분은 상해버렸다. 친한 사이였다면  “단어 선택 좀 우아하게 해 줄래?” 하고 웃으며  이야기했겠지만, 평소의 나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호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에 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늙다’라는 말 대신 ‘나이 들다’라는 꽤 좋은 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노마드랜드>는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실제로 노마트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는 삶에서 모든 것을 잃고 광활한 자연과 함께 길 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여 자발적 노마드를 선택한 주인공 ‘펀’이 나온다. 펀이 자신의 제자였던 소녀와 나누는 대화에서 소녀가 펀에게 물었다. “홈리스가 되었다면서요?”, “아니야, 난 홈리스가 아니야, 나는 하우스리스야. 그 둘이 다르다는 것 알고 있지?”


예측불가능하고, 불확실하며  빠르게 변하는 100세 시대에 겨우 40을 갓 넘은 내가 늙었다는 말을 듣는다는 게 어리둥절했고,  ‘4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너랑 나랑 뭐가 다르니?’라고 되묻고 싶은 억울함에 평소의 나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하고 빠르게 나의 호흡으로 돌아왔다. 이때 나는 약간의 즐거움과 소진 사이를 줄타기하며,  ‘알아차림’은 습관화되어있었고, 조직 내 불편한 관계 속에서 ‘훈련된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조직 내의 위상과 안위가 가끔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회사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는 자발적 유배를 선택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길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쉬운 일을 선택한 지루함을 안정적인 상태에서 많은 것을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활력이 메워주고 있었다. 나이 듦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기엔  원하는 삶을 찾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물어보고 시도해봐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 ‘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탐험가들은 늘 길을 잃었습니다. 모든 장소가 처음 가보는 장소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그럴 때 쓸 수 있는 수단들에 정통했고, 자신이 어느 경로로 가고 있는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자신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였을 겁니다.”  

탐험가들은 야생에서 길을 잃어 보았기 때문에 되돌아가기 위한 기술과 정보를 터득할 수 있었고,  주변 상황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기술이 필요한 것을 알았다. 경로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수많은 시행착오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지 않는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기술과 정보를  습득하는 시간이며,  습득된 기술과 정보는 가고자 하는 길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길을 완전히 잃은 뒤에야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가고자 하는 길에서 여유와 풍류를 즐기 수 있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어느 하와이 생물학자는 열대우림에서 새 생물종을 발견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을 잃는다.’는 사실도 빼먹지 않았다.

 

“오늘 좀 더 운이 좋았을 뿐” 2021년 <뉴욕타임스>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의 영광을 얻은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소감을 위트와 감동이 조화된 최고의 수상소감으로 뽑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재조명된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새삼스럽게 극찬하기엔 그녀의 연기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너무 당연하다. 영화 <미나리>는 차지하고서 세계적인 시상식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못해 한국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솔직하고 당당하며, 위트 있는 답변과 의연한 태도는 20, 30대 배우 어느 누구보다 ‘쿨’했고, 강단 있는 여유와 빛나는 존재감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두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이자 생계형 배우는  유일무이 개성 있고 깊이 있는 연기자로 승화되었고, 그녀가 빛나는 순간 70이라는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양경숙 시인의 시 “그대는 늙어 보았는가” 의 한 구절을 다이어리에 필사했다. “늙어보니 마음은 늙은 것이 아니고, 푸른 바탕에 붉은 심장으로 펄떡이더라.” 40살이 되고도 6년이 지난 후 나는 퇴사를 했고, 책과 명상으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리고  내 심장은 여전히 펄떡이고 있다. 길을 잃고 방황하고, 다양한 시도와 도전 그리고 실패를 통해 익히고 배운 삶의 지혜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다. 명상 수업에서 교육생에게 빼먹지 않고 해주는 말이 있다. “언제나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러나 살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같이 가지 못 갈 때가 있고,  몸이 마음을 받아주지 않거나 마음이 몸을 밀어낼 때도 있다. 그래서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마지막 30대를 아쉬워할 땐, 40이 되면 세상이 끝나거나 내가 끝나거나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불안에 휩싸였지만 막상 40이 되고 나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은 수많은 우연의 조각들로 이어진 가벼운 궤적에 불가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결정적인 선택과 필연적인 결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럴싸한 결정적인 선택과 필연적인 결과를 위해 수많은 우연의 조각들이 더 다채롭고 극적이면 좋겠다. 그 우연의 조각들을 내가 선택하고 조율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가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뜨거운 여름날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해가 지듯이, 우리는 똑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인생이라는 파도를 타고 있는 것이다. 40대가 되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동안 축적된 노력과 정보로 쌓인 데이터로 더 많은 시도와 노력을 할 수 있다. 아주 능숙하게 때론 현란하게 내 인생의 파도를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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