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아래 오래 머물던 여름은 천지가 쓸쓸해진다는 처서가 지나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더니 늦여름의 장막을 걷어내는 빗줄기 속에서 자치를 감추었다. 가을이 오나 보다 싶으면 어느새 요지부동 겨울이 되지만, 올해만큼은 금세 사라지는 가을도 심술 맞은 겨울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따뜻하고 맑은 찻잔 속에 가을이 스며들면 내면의 여유와 평온은 귀한 차의 향긋함으로 물들어간다. 확연히 달라진 공기의 질감과 미묘하게 변하는 자연의 흐름은 감미로운 무이암차의 향을 오래도록 붙잡아 둔다.
창으로 깊이 스며드는 햇살과 차 달이는 향이 어우러져 가을이 들어선 주말 점심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깊어지고 맑아지는 월광백차와 백호은침은 다시 차상자에 잘 보관하고, 무이암차 육계와 수선을 만지작 거리며, 잠시 고민했지만 육계를 집어 들고 찻자리를 준비한다. 자사호와 숙우, 보듬이와 찻물 주전자, 퇴수기, 다건으로 혼자 마시는 정갈하고 소박한 찻상을 준비하는 동안 이미 마음은 고요함 속에서 깊은 알아차림으로 이어진다. 차를 음미하는 것만큼이나 차를 향한 손짓과 몸짓을 무척 흠모한다. 찻자리의 풍부한 감각의 세계는 균형 잃은 몸과 마음에 조화롭게 스며들어, 떠도는 마음을 쉬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한다. ‘딩동’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서정아, 오늘 김밥 좀 말았어! “
금세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하늘과 바람에 온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니던 날, 종로구 창의문로에 위치한 작은 티하우스에서 마셨던 우전차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새하얀 개완 속 연둣빛 어린 찻잎이 이끄는 세상에서 부드럽게 이완되고 섬세하게 되살아 나는 나의 감각은 차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던 찻잔의 온기와 맑고 청아한 우전차의 색과 맛은 내 몸의 감각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찻잔의 향과 훈이 호흡 속에서 부드럽게 피어올라, 지쳐있던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워주고 복잡한 머릿속의 고민들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차에서 삶의 향기를 배운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첫인상이 강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또렸해 지고, 어렵지 않게 나의 취향으로 흡수되곤 한다. 여름에는 찬 성질이 강하고 블렌딩 하기 좋은 우아하고 은은한 백차를 즐기고, 가을에는 깊은 향을 가득 품은 청차를 즐기는 것은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취향이다. 명상을 시작하고 2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차의 고요하고 향긋한 정서에 도달하게 되었고, 삶과 알아차림은 차 한잔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차를 마시면서 라이프스타일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고 미세하게 수정되고 있었다.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는 것과 티하우스에서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엄청난 삶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여유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때 취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치스럽고 멀게만 느껴졌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거나 옅어지는 것들 사이에 유독 취향만큼은 더욱 확고해지는 것 같다. ‘취향’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니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라고 한다. 결국 취향도 마음이었다. 우리는 뭔가를 정확히 기억하는데 서툴고, 마음은 중요한 정보를 늘 잊어버린다. 마음을 바라보는 것은 내게 중요한 것들을 꼭 붙잡아 두어 나와 연결되고 취향이 발견되는 시간이다. 취향은 나의 마음과 함께 나의 하루를 가꾸어 나간다.
차를 즐기며 마시는 것은 즐거운 시간이지만, 워낙 음식에 예민하고 특히 카페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체질이다. 차를 진하게 우려 마시거나 지나치게 많이 마시거나 혹은 빈속에 마시면 그날 하루는 거의 초주검에 가깝게 하루를 버터야 하고, 밤에 잠까지 설쳐야 한다. 차는 주로 오전이나 점심을 먹은 후 즐기는 편이다. 차로 이동하면서 외부 일정을 소화할 때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을 나설 때, 간단하게 견과류나 과일을 준비해서 나오긴 하지만 하루 중 가장 맛있고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하는 점심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차로 이동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당시에 중간에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 일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하지도 못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밥과 갖가지 영양소를 고려한 알록달록 반찬을 한입에 쏙 먹을 수 있는 김밥을 좋아했다. 요즘도 가끔 엄마가 싸주는 김밥에 가을 소풍을 기다리는 중학생처럼 두근두근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이 되어서도 바쁘고 배고픈 나의 든든한 먹거리가 되어준 김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김밥을 포장한 호일 일부를 벗겨내어 한 손에 들고 한 알씩 쏙쏙 빼먹는 즐거움을 아는가!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할 때는 김밥 한 줄을 미리 포장해서 조수석에 싣고 출발한다. 점심때가 되면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김밥을 집어 들고 능숙하게 드라이브하며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는 빠듯한 저녁을 알차게 해결한 나의 소울푸드이자 힐링푸드였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라는 불평조차 삼켜버린 김밥 한 줄의 든든함과 완벽함, 깔끔함과 경쾌함에 나는 홀딱 빠져있다. 그래서 오히려 김밥은 과식을 불러온다. 김훈 작가님의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에 작가님의 김밥에 대한 애정과 통찰이 꼭 내 맘 같다.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가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김밥의 가벼움은 서늘하다.”
이듬해,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던 날 등황빛으로 빛나던 묵직하고 맑은 무이암차는 새로운 차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난향과 과향으로 금세 마음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어수선하고 번잡한 마음에 정갈함과 고요함이 스며들었고, 김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워 걱정 없이 맘껏 차를 즐겼던 그날 이후 가을이 다가오면 무이암차를 내려 맛있는 김밥으로 추억에 빠져본다. 한 입에 쏙 밀어 넣는 김밥 한알과 입안으로 퍼지는 육계 무이암차의 풍성한 향은 꽤 훌륭한 페어링이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김밥과 어른이 되어 좋아하게 된 차가 만난 취향은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삶으로 스며들었다. 취향은 부지불식간의 끌림이고 마음의 알아차림이며, 무한반복을 통해서만 심장에 도달하여 내 것이 된다.
그나저나 김밥은 엄마가 만들어 주는 김밥이 제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