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과 어떤 시간은 서로 이어진다. 특별히 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내면이 따스하고 잔잔하게 때로는 폭풍처럼 싸우는 동안에 어떤 시간과 어떤 시간은 내 호흡의 리듬으로 고요하게 스며들곤 한다. 부지불식간에 이어진 시간과 시간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어 시공간을 초월한 듯 지나간 시간을 생생하게 지금으로 가져온다. 평소 별생각이 없었던 어떤 날 중에 하나가 불쑥 떠오르기도 하지만 특정한 시기 특별히 강렬했지만 잊고 있던 순간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삶에서 진정 필요한 것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늘 똑같이 보아오던 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발견이라면 여러 순간에서 놓친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며 감탄하고 기뻐하는 삶의 순간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의미 있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한 순간이 현재와 이어져 지금 또 하나의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 내듯이. 지나온 날과 다가올 날들에서 그 무엇도 아닌 지금-여기로의 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행운과 불운이 선택이라면 너무 가혹하지만 과거의 수령에 빠지지 않고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인 것이다.
나 자신을 향해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난 후, 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로서 헤르만 헤세의 매력이 나에게 충분히 닿지 않은 이유를 찾는다면, 지나치게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는 작품들은 이미 읽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이 거대한 제목 말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사실 헤르만 헤세는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루한 작가라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같이 쌓인 책장을 바라보면서도 ‘헤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은 헤세가 화가이자 멋진 정원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다. 서둘러 헤세 문학전집을 사다 두었지만, 헤세의 시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한참을 책등만 바라보았다.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
나무야, 얼마나 가지를 잘라댔는지
너무나 낯설고 이상한 모습이구나
어떻게 수백 번의 고통을 견뎠을까
너에게는 이제 반항과 의지만 남았구나
나도 너와 같다.
가지는 잘려나가고 고통스러운 삶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야만을 견디며
매일 이마를 다시 햇빛 속으로 들이민다
내 안의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이 세상은 몹시도 경멸했지
그러나 누구도 내 존재를 파괴할 수 없다.
나는 자족하고 타협하고
수백 번 가지가 잘려나가더라도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낸다
그 모든 아픔에도 이 미친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기에
‘나도 너와 같다. 나도 너와 같다. 나도 너와 같다. 나도 너와 같다. 나도 너와 같다.‘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마음의 메아리는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좋아하는 것을 즐길 때, 행복호르몬 옥시토신이 기능한다면 느닷없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옥시토신이 희열로 발현되겠지. 온몸 곳곳이 상처투성가 되어도 끝끝내 새로운 잎을 틔우는 나무의 아이러니는 상반되는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때, 균형과 조화가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고유성과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헤세의 지혜를 군말 없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동양철학의 ‘상즉’이란 말을 좋아한다. 서로 대립되는 것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풀이하면, 두 사물의 그 본체에서는 서로 하나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은 어둠과, 가벼움은 무거움과, 물성은 비물성과 행복은 고통과 함께할 뿐만 아니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의 들숨과 날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음악과 그림을 즐기며 정원을 가꾸는 명상하는 농부라니, 작가 헤세는 새롭게 다가왔고, 나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고, 어느덧 그의 문장으로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
“이때부터 한스는 매일 식사를 마친 뒤 한 시간씩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봄이 성큼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둥글게 굽어진 아름다운 언덕 위로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푸른 초목들이 마치 맑고 엷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무들은 윤곽이 뚜렷한 갈색의 그물과도 같은 겨울의 형상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어린 잎사귀들과의 유희를 즐기며 함께 어우러졌다. 그래서 살아 숨 쉬는 신록의 파도가 끝없이 넘쳐흐르는 시골의 색깔을 띠는 것이었다. 한스는 어린 잎사귀들이 향내음을 맡으며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산들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들판을 거닐었다. 그는 거의 내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숱한 형상들을 보고 있었다. 한스 자신은 그것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밝고 부드럽고 색다른 꿈들이었다. 마치 초상처럼, 낯선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가로수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단지 바라보기 위하여 존재하는 순수한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을 바라보는 것이 곧 한스에게는 하나의 체험이었다. 낯선 대지, 밟기 편안한 부드러운 땅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가볍고 잔잔한 꿈으로 가득 찬 향료가 스며든 낯선 공기를 보호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들 대신에 때로는 어두우면서도 따뜻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마치 가벼운 손길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길, 그 길을 찾기 위한 힘든 여정을 걸어가는 헤세 작품 속 인물들에서 잊고 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지금을 차분히 다듬어 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를 성인이 되어서야 고민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다는 사실은 항상 슬프다. 풀을 말리는 일, 산책을 하는 일, 수영을 하는 일, 낚시질을 하는 일을 사랑했던 <수레바퀴 아래서>의 어린 소년 한스 기벤라트에게서 작은 위안과 즐거움을 찾았다. 끊임없는 내적혼란과 불안 속에서 자아를 탐구하던 젊은 날의 헤세가 투영된 <데미안>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내 안으로의 침투에 몰두하던 나에게 그저 사랑하고 바라보라며 텅 빈 마음의 공간으로 바깥공기를 가득 밀어 넣어 주었다. 데미안은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닌 싱클레어 안에 완전하게 자리 잡은 또 하나이 싱클레어였고, 싱클레어가 되고 싶은 싱클레어였다. 윤리와 미학의 조화를 문학적 문장으로 담아낸 헤세에게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딘지 익숙하고도 뻔한 듯한 삶의 내러티브는 자신의 주변과 친숙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길 줄 아는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작가의 삶의 태도와 그칠 줄 모르는 자신에게로의 집요한 마음이 묻어나는 문장들이 압도해 버렸다. “욕망을 멈추고 관조가 시작되는 순간,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는 헤세의 문장들에서 나는 순식간에 나의 어떤 시간으로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강원도 평창에 가까울수록 이미 온통 하얀 세상 위로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 때문에 속도가 점점 줄더니 결국 거북이 속도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오대산 월정사 주지스님과의 인터뷰 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게 뻔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설경에 도취되어 걱정과 불안은 어딘가로 도망가 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따로 출발했던 기획사 편집 담당자와 포터그래퍼가 늦지 않게 도착할 예정이라는 짧은 문자를 보내온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깊은 산속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약 1km의 천년의 시간이 만들어 놓은 숲길, 언제나 짙푸른 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키가 큰 전나무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든 눈 쌓인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지나고 선재길을 따라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이미 반쯤은 다 젖어 버린 아끼던 브라운 세무부츠 속 발가락에는 감각이 없었고, 발목까지 푹푹 꺼지는 눈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입가에 퍼지던 미소와 피식 새어 나오던 웃음소리는 무미건조하고 미성숙한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날 내가 늦었는지, 늦지는 않았지만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물론 기다리던 분들에게도 약속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살아난 감각들은 정해진 시간에 누군가를 만나고 꼭 처리해야 하는 기존의 굳건한 원칙과 기준의 이성적 영역을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1시간 이상 무릎을 꿇고 앉아 반쯤은 쥐가 나 무감각해진 다리에 주의를 빼앗겼지만, 나지막한 목소리와 엷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씀하시는 스님의 얼굴뒤로 영험한 정기를 품고 있는 새하얀 사찰의 눈 내리는 차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창밖으로 소리 없이 아름답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셨던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와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님 너무 잘 생기셨어요. 출가하시기 전에 인기 많으셨을 것 같아요.” 하고 건넸던 지금은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우스꽝스럽고 해맑은 질문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던 시간 또한 또렷하게 기억한다. 극단적인 삶의 변화를 모색하기에 나의 20대는 아직 건너지 못한 눈앞의 돌다리가 탐나고도 무겁게 다가왔던 것 같다. 기억에서 자주 소환해 내지는 못했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 불쑥하고 나타나 나를 온전히 그 순간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포착한 여려 겹의 미묘한 찰나의 순간이 지금 이 순간과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은 헤세의 문학 덕분에 더욱 생생하고 강렬하게 이어졌다. 마당까지 배웅해 주신 주지스님과 마주 보고 얼굴과 손바닥으로 눈을 맞으며 나누었던 담소 그리고 그 장면을 멋지게 남겨 준 포토그래퍼 덕분에 나는 그 순간을 마음으로 그리고 멋진 한 장의 사진으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여 년 전의 기억이 희미해질지언정, 특정 경험과 자극은 더 도드러지고 선명해진다. 그 낯선 자극들은 희미하게나마 내 안의 세계를 더듬기 시작했고, 뭔지 모를 내면의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강원도 평창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훌쩍 지나고서 이다. 지푸라기라도 건진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알아차림 명상에 대한 확신은 어느새 나를 명상 지도자의 길로 안내하고 있었고, 7박 8일 과정으로 진행되는 한 명상 지도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둔 연차를 써서 오대산 자연명상마을로 향했다. 일주일치 짐을 캐리어에 밀어 넣었다. 어딘가로 떠날 때, 캐리어 한편을 가득 채우던 책은 한 권도 담지 않았다. 일상 공간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싶은 마음은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분주히 오가는 발놀림의 섬세함으로 이어졌다. 달리던 차 안에서는 평소에 자주 듣던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친 일상을 한결같이 위로해 주며, 고요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도와준 음악이 긴 휴가를 떠나는 설레는 이의 마음과 함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니, 의도적인 일상과의 분리를 시도하며, 평소에는 잘 듣지 않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바꿔 달렸다. 마음이 훨씬 가볍고 경쾌해졌다. 혼밥은 이미 자연스러웠고, 회사식당 밥에 신물이 난 나는 흡사 전투적인 여행객 모드로 전환되어 맛집 찾기에 나섰다.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무침, 황태국까지, 평소보다 2배나 되는 양의 음식을 시켜놓고 말끔히 비워버렸다. 언제 마음을 다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는, 언제 스스로 만들어 둔 미궁에서 헤맬지 모르는 불안과 남아 있는 에너지를 몰아 쓰고 지쳐 쓰러지는 어두운 밤에서, 날카롭고 불안한 삶의 공간에서 벗어나면 몸과 마음은 자유로워로지게 마련이니까. 다시 돌아온 이 곳은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른 것이 없었지만, 붉게 물든 세상에 어쩐 일인지 더 아름다운 깊이감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지나친 긴장과 불필요한 소심함에서 멀어져 마음의 속도를 가다듬어 고요함 속으로 내려놓았다. 나뭇잎을 감싸 안은 햇살과 뺨을 타고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청량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오롯이 느끼며 만끽하는 이 계절의 해방감이 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가을날의 태양 아래 다채로운 빛깔로 물든 고요한 정취에서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은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어느 겨울의 전나무숲길로 나를 데려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생생한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흩어졌다. 어느 겨울과 어느 가을과 지금의 헤르만 헤세는 나를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특별히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질 때만이 느끼고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