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비가 쏟아지던 5월의 어느 날. 복잡하고 바쁜 도심과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마주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가 않다. 아니 몹시 낭패다. 며칠 잦은 비가 내렸음에도 일기 예보를 챙기지 않은 탓에 편의점에서 우산하나를 짚어 들고, 하얀 면바지를 살짝 한번 걷어올렸다. “아이고, 아가씨! 오늘 같은 날씨에 흰 바지는 아니지, 그래가꼬 됐겠나, 더 걷어올려야지, 베리면 못 쓴데이!”. 그 사이 창밖의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있었다. “아 , 그렇겠죠!”, 민방한 듯 편의점 사장님을 향해 찡끗 웃어 보이며 창피함을 무릅쓰고 바지를 무릎까지 동동 걷어 집으로 돌아가는 만원 지하철에 무거운 몸을 실었다. “죽기도 살기도 좋은 날씨”라던지 “나는 잠깐 설웁다”라던가 “자유로울것” “외로운 도시” 혹은 “아름다운 그런데”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노란 우산” 따위의 제목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스쳐간다. 본가에 들러 엄마표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자 노곤함이 몰려와 당장에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 속으로 스르륵 몸을 구겨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며, 건넨 책 세 권중 한 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를 포함 3명의 회원으로 꾸려가는 조촐한 ‘가족 독서모임에서 읽어보면 어떻겠냐’는 중2 조카를 고려한 사려 깊은 동생의 제안이었다. (Feat. 내게 책을 건네는 유일한 사람)
비 오는 날 밖에서 시달리면 으레 기운이 쏙 빠지게 마련이며, 이런 날은 센티멘탈이 아닌 디프레시브에 더 가깝다. 머리도 복잡하고 읽어야 할 책도 써야 할 글도 밀린 터라 별 생각이 없었다. 제목조차 ‘이건 좀 너무 구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지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프로젝트로 탄생한 의미 있는 책이라니 금세 눈이 동그래졌다. <소나기> 속편을 담은 책의 제목으로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야!’ 새로 들어온 정보에 나는 금세 간사해지고 말았다. 무겁고 너덜거리는 마음을 동반한 도심 속의 황량한 빗줄기가 전설 같은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첫사랑을 담은 고운 소나기로 환치되는 순간이다. 젖은 바지단을 덜렁덜렁 거리며 책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할 일 다 제쳐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작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들의 5편의 속편이 실렸고, 23년 동안 몸담았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위주로 4편의 속편을 실었으며 공모를 시행하여 고등부와 일반부에서 각기 1편씩 총 9편의 속편을 담은 책에 대한 기대는 순간적으로 치솟아 올랐다. ‘구병모’ 내가 애정하는 작가의 이름이 황순원 <소나기>에 이어 첫 번째 속편으로 이어진다. <소나기> - 황순원, <헤살> - 구병모 이 책을 어떻게 그냥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헤살> : ‘물 따위를 젓거나 하여 흩뜨림. 혹은 그런 짓’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 단어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겼다.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이거나 미소를 짓다.’라는 의미로 ‘헤살헤살하다’라는 동사도 발견했다. 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멋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이미지와 함께 오랜 기억 속에 켜켜이 숨어 있던 국민 소설 <소나기> 감성으로 헤살헤살해지는 것만 같았다. 갈밭과 메밀밭을 배경으로 한 개울가, 보랏빛 빗방울, 찰랑찰랑 맑게 흐르는 물소리,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아 헤살 젖는 소리, 손으로 전해 오는 듯한 물결을 가르는 부드러움과 시원함이 스며들었다. 비 오던 날 소녀가 입었던 분홍 스웨터로 끝나는 황순원의 <소나기>와 비가 그친 뒤 소녀를 없고 도랑을 건널 때 입었던 소년의 저고리로 마무리되는 구병모의 <헤살>은 이질감 없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개울가, 징검다리, 소나기, 메밀밭, 호두밭, 대추알, 마타리꽃, 분홍 스웨터와 저고리.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아.” 다른 속편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했지만, 몇 문장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구병모 작가님의 ‘헤살’을 이겨낼 문장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은 다르게 흐르는 듯한 시간과 급작스럽게 찾아온 무위속에 피어나는 향기가 방어막을 쳤을지도. 그게 맞다. 내가 내어준 자리에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실재하지 않지만 어느 날 문득 생생한 느낌으로 찾아와 나를 위로해 줄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나는 만끽하며 새겨 넣었다. 나보다도 먼저 와 자리 잡은 간결하고 서정적인 문장들이 전해준 몸과 마음 곁에 자리한 맑고 깨끗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의 여운은 꽤 강렬하고 오랫동안 직속되었다.
구병모 작가님의 <헤살>은 며칠을 까닭 없이 앓다가 일어난 소년이 옆구리에 책보를 끼고 집을 나서면서 시작한다. 주머니 속 조약돌과 호두 알 몇 개를 만지작 거리며 소녀와 함께 했던 개울을 끝내 건너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어머니의 바느질감 사이에서 터지고 헤진 소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입었던 자기 저고리를 발견한다. 흙물이 들어 더럽기까지 한 젖은 저고리를 품에 넣고 이불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년은 개울에다 저고리를 스스를 떨어뜨린다. 유유히 흘러가는 저고리를 바라보며 소년은 징검다리를 생각보다 가볍게 한 칸씩 한 칸씩 건너기 시작했다.
삶이 자기가 껴안고 있는 만큼의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소년이 자기의 저고리를 물살을 따라 유유히 떠나보내고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짧은 동통에서 벗어났으며 팔을 뻗어 보이지 않는 곳 더 멀리까지 가 닿고자 하는 마음의 의지가 생겼다는 방증이다. 마치 물에 펼쳐진 저고리 소매가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듯이, 물살에 흔들리는 소매가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듯이, 나도 검은 빗방울 속에서 꼬옥 껴안고 있던 두 팔을 쭉 뻗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고요히 맞아본다.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올 또 다른 이 순간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