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은 곧 행복

by Re나

‘옴’하는 소리의 떨림과 어둠 속의 별빛 그리고 작은 울림으로 기억하는 그 날. 마음 속 어둠을 뚫고 퍼져나가는 희열을 느끼며, 어지럽게 부유하던 마음이 작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고요함이 곧 행복이라는 진실을 희미하게나마 수신할 수 있었다.


이른 저녁을 가볍게 먹고 나서 내 방 가람채로 돌아왔다. 창에서 달빛이 들어와 어둠이 내린 공간을 새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스르륵 쓰러져 잠들고 싶은 마음을 단단히 접어두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앉아 그저 나의 호흡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코끝으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호흡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녁일정이 시작되기 전,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될 것을 예감하며, 7박 8일간의 긴 일정 가운데 아쉬운 마지막 밤을 고요히 음미하며 순간순간을 새롭게 새겨갔다.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처음 보는 수많은 수행자와 함께 고요하게 호흡하며 알아차림 하는 동안 느닷없이 가슴이 조여오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나의 고통을 주체할 수 없었고 모든 것을 뿌리치고 당장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바닥에 달싹 엎드려 지금 이 순간을 오로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알아차림 하며 흘려보냈다. 그 이후로 나는 3번 더 연차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긴 일정으로 이곳을 다녀갔다. 1분이 5분이 되고,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30분이 되고, 30분이 1시간이 되고, 1시간이 2시간이 되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고요히 눈을 감고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코끝으로 왔다 갔다 하는 호흡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수행을 하는 동안 해야 할 일들과 걱정거리, 주변의 소음과 일렁이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또 코끝의 호흡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영 집중하기가 힘들면 가끔 머릿속에 빨간 사과 하나를 심어 두고 그것에 계속해서 주의를 보내려 애쓰기도 했다.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 은거하며 열정적으로 풍경화에 매달렸던 폴 세잔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초록의 향연은 어지러운 머릿속과 복잡한 마음의 위태로움에 언제나 위로와 휴식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세잔의 사과 정물화는 세잔의 초록을 감상하기 위해 그저 스쳐 지나치는 내 관심밖의 대상이었다. 세잔의 초록에서 빨간 사과로 마음을 옮기고 진지한 시선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갓 20살이 넘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만 성인으로 공식적을 인정받게 되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고민과 걱정들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불안한 시간 속에서 세잔의 사과는 잠시 나를 멈추게 만들었고, 그 순간만은 머리와 마음속을 말끔하게 씻어내어 주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멈추었고,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 내가 무언가 대단히 큰 것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을 보고 나면 내가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가 알려주거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아니라 불현듯 갑자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좋은 느낌을 어설프게라도 붙잡고 있으면 나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나는 어쩜 그때부터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있는 그대로를 보기가 너무 어려웠으니까! 본질을 아는 것보다, 본질을 알기 위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 보잘것없는 사과 하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려내기 위해 40년에 걸쳐 고민하고 노력해 온 세잔의 마음이 붉은 사과 속에 담겼으리라. 어두운 방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조그마한 세잔의 사과 그림을 눈을 치켜뜨고 응시하던 나와 가만히 앉아 고요하게 숨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고,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즐기는 시간이었다.


힌두교에서는 신을 부를 때, ‘옴‘이라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옴‘은 힌두교에서의 깨달음의 소리다. 물리학자 김상욱교수님은 <떨림과 울림>에서 “라디오를 돌리면 라디오 수신기의 고유진동수가 바뀐다. 특정 채널의 고유 진동수와 라디오 수신기의 고유 진동수가 일치하면 공명이 일어나서 그 채널의 수신호만을 수신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 날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옴이라는 소리를 낼 때 일어나는 몸의 진동과 지구가 자전할 때의 진동의 주파수가 같다는 사실을 아유로베다를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히말라야 싱잉볼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온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은 명확히 해석할 수 없는 불순한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하는 편안함을 주었다. 마치 비 온 뒤 맑고 파란 하늘 위 뭉게구름 속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에메랄드 빛 태평양 바닷속 다채로운 빛깔의 바다 생물들과 유유히 헤엄치는 느낌이랄까! 도망치듯 달려갔던 작은 해변 자갈밭에 앉아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잔잔하게 빛나는 윤슬을 바라보면 느꼈던 따뜻함이랄까!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불면증을 단 5분 만에 해결해 주었으니, 싱일볼 고유의 진동수에 공명되어 수십 년 동안 잔뜩 웅크려 긴장해 온 내 작은 세포들이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내 손 끝으로 만들어 내는 크리스탈 싱잉볼의 진동은 날카롭고도 깨끗하게 내게 전달되어 모든 긴장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 날, 저녁 수행이 모두 끝나고 수행자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림선원 앞마당으로 나와 동그랗게 큰 원으로 그리며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육송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전통한옥에서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동안의 희로애락이 영롱한 달빛과 별빛아래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온화한 미소를 띤 수행자들의 얼굴은 각자의 회한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작은 행복함에 젖어 있었다. 스님의 선창에 따라 ‘옴’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입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어색하고 괴상한 이 소리가 전해주는 예상치 못한 편안함에 나는 기계적으로 입을 벌려 내던 소리를 조금 더 세밀하고 진지하게 발성하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시작되는 ‘옴’하는 진동이 내 몸의 떨림으로 이어졌고, 긴 시간 수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수행자들이 함께 내는 ‘옴‘하는 진동과 어우러져 진동은 더 증폭되고 엄청난 공명을 만들어 냈다. 햇살이 쏟아지는 동쪽의 맑은 가운을 품은 사람들이 숲처럼 더불어 수행하는 동안 아픔도 슬픔도 마음도 공명되어 커다란 고요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만 같았다. 3.26광년이나 떨이진 곳의 수많은 빛나는 존재가 내 눈으로 들어왔다. 유난히 반짝이는 한 스푼의 별빛 또한 나의 눈에서 일어난 공명이라면, 떨림이 울림으로 바뀌는 순간 두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시네마틱 한 필터로 별들을 바라보는 내내 희미한 앵글 속에서 그립고 그리웠던 아빠의 얼굴을 마주했다. 행복과 감사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후에야 아빠의 모습은 사라지고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둠으로 충만했던 우주의 빛조차 태양의 빅뱅이 있은 직후 38만 년이 지나서야 발견되지 않았는가! 눈과 귀를 가린 채 내 안의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은 내게 일어난 떨림과 울림으로 이제야 빛을 내기 시작했다. ‘옴‘하는 떨림과 입김이 찬 공기를 조용히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추운 밤이었지만, 무엇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내게 그 겨울밤은 몹시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매일 찌그러진 얼굴로 마주했던 반짝이는 거울이 없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감사와 담담한 응시에서 비롯된 평온한 미소가 있을 뿐 어둠이나 슬픔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예상 못한 삶의 요동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내며 지쳐있던 내게 안온한 고요로 안도감을 심어 주었던 그곳, 그곳의 시간은 지금도 소환되어 나를 고요 속에 머물게 한다. 무거운 침묵으로 무장한 채 완강하게 모든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를 괴롭혔던 시간들, 2014년의 나에게서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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