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안에서 숨을 쉬다.

by Re나

비현실적인 고요함과 마음의 일렁임을 감지하며 숨죽인 채 귀 기울여 들었다. 무대 위에서 은은히 반짝이던 수십 개의 조명과 수천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온전히 피아노 건반과 손가락에 집중하여 열정을 쏟아내어 그 시간을 압도해 버린 한 사람의 몸짓과 공연장을 울리는 몽환적이고 세련된 선율은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다. 소박한 연주회장 맨 뒷줄 구석에서 매혹적인 시간을 즐기면서도 여전히 그날에 대해 음미하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첫 경험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다. 곧추세운 허리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둔 두 손에서 약간의 격식과 긴장이 흘렀고, 두 눈을 지긋히 감고 장엄하고 엄숙한 공간에서 고요히 음악을 기다리는 마음은 20년 이상 발휘해 온 인내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내 삶이 짊어졌던 무거운 짐 가운데 하나가 툭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무엇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와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무채색 톤다운된 컬러의 세련된 청중들의 옷차림, 조심스럽게 걷는 사려 깊은 발걸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들에서조차 편안함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내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들숨과 날숨의 낯선 고요함에 젖어들었다. 오랫동안 내 삶에서 희미했던 존재, 고요하고 편안하게 흐르는 나의 호흡을 가만히 느낄 수 있었다. 깊은 한숨으로도 해소되지 않던 마음속 응어리들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울림과 함께 사라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마음으로만 흠모해 왔던 클래식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대가 막 지날즈음이었다. “베토벤이 어떤 곡에서 바이올린 성부의 핑거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는지, 베를리오즈가 어디에서 호른을 투입하며 이례적으로 대담한 시도를 했는지, 이 대목 저 대목의 막강한 효과가 페달 포인트에 기인하는지, 약음기를 낀 첼로의 음색 덕분인지, 또 무엇 무엇 때문인지, 그걸 아는 건 멋진 일이고 유익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음악을 향유할 때 없어도 괜찮다.” 헤르만 헤세의 음악적 조언을 조금 빨리 알았더라면 클래식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텐데. ‘예술‘이라는 두 음절이 주는 두근거림이 클래식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담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이라던지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굴드의 예술과 삶에 대한 강박관념을 두드러지게 다루었던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와 같은 소설책은 클래식에 대한 나의 마음을 더욱더 고양시켜 주었다. 약간의 허영을 너그러이 인정하며 가끔 공연장을 찾았고, 떠도는 마음의 공허함을 가득 채워 오곤 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도 이제 괜찮다는 마음의 다짐과 함께, 멋진 공연장과 아름다운 선율의 뒤에는 한껏 움츠려 들고 불안했던 마음이 늘 따라다닌다. 설익은 감정들이 오가는 동안 슬픔과 미움이라는 감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삶에서 스스로 쉼표를 찍는 법과 느리게 걷는 법을 배워가며 알아갔다.

세련된 검정정장과 그레이 캐시미어 코트, 다크 그레이 머플러와 검정 반투명 스타킹, 빨간 에나멜 가방 그리고 검은색 에나멜 하이힐. 프로그램 책자에 눈길을 둔 채 감미로운 긴장감을 즐기며 공연장으로 들어선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지웠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부산에서 오랜만에 클래식연주회를 찾았다. 산책길에 우연히 발견한 가로등에 걸린 현수막을 보지 못했다면 꽤 오랫동안 부산에 클래식콘서트홀이 생겼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트롯가수들의 공연을 알리는 현란한 현수막에 지친 탓에 가로등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수막들은 애써 외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조성진 챔버콘서트가 부산에서 열린다고! 가짜뉴스인가? 어디서? 언제? 심장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눈은 현수막 광고문구를 쫒고 어느새 손가락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뭐라고 이미 매진된 조성진 예매 사이트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부산에 콘서트홀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언제든지 편하게 근사한 공간에서 좋은 연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연일정을 뒤적이다 손민수피아니스트 리사이틀을 발견하곤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일정을 확인 후 티켓 4장을 예매했다. 그리고 한 달을 기다렸다.


하얀 반바지에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나의 편한 차림도 그렇지만 4,406개의 파이프를 갖춘 파이프 오르간이 무대 정면에 설치되어 은빛으로 반짝이고 빈야드를 연상시키는 2,000석 규모의 콘서트홀은 웅장하고 장엄하기보다는 경쾌하고 캐주얼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가볍고 편안한 관람객들의 복장에서도 언제든 늘어지고 풀어질 수 있는 7월의 뜨거운 태양이 느껴지는 듯했다. 가장 높은 3층 맨 뒤쪽 바로 앞자리, 남은 좌석이 많지 않아 선택지가 없었다. 연주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명당자리는 어쩔 수 없는 긴장과 떨림을 동반하기에 무대와 나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안도감을 즐기는 것이 훨씬 좋을 때도 있는 법.


손민수리사이틀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제 30, 31, 32번 연주였다. 아주 반듯한 자세와 기품 있고 정중한 발걸음으로 등장한 연주자는 긴장과 들뜸이 혼재된 빈틈없이 들어찬 거대한 홀을 향해 형식을 갖추 돼 호의적이고 신사적인 몸짓으로 몇 차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노련하되 선량함을 놓치지 않는 품위 있는 모습에서 그가 약간 긴장하고 있고 몰입할 준비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 무대인사를 하는 연주자가 주는 느낌에 따라 연주자가 연주를 하는 동안 연주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기도 하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하는데 손민수 피아니스트는 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들려주는 선율의 울림만큼이나 보이는 움직임과 선들이 인상적인 연주자다. 피아노 건반과 손가락의 움직임, 선율에 따라 흔들리는 작은 몸짓과 머리카락의 흔들림까지도 연주와 조화되어 울림으로 다가왔다.

베토벤 소나타 제31번 두 번째 악장은 고통에서 회복이라는 내면의 침잠과 다시 솟아오르는 생명의 움직임이 녹아있는 구조로 구성된다. 섬세하고 유려한 선율로 시작해서 날카롭고도 에너지 넘치는 리듬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애절하고 드라마틱한 전개를 따라 무대와 맞닿은 발의 움직임과 구둣소리마저 나를 매료시켰다. 묵직하고 강렬한 리듬이 가볍고 소박한 선율로 흩어질 때 선율에 따라 흔들리던 마음과 호흡이 고요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평온한 선율이 흐르고 그 리듬이 희미해져 갈 때까지 깊은 내면의 성찰과 편안한 호흡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며, 피아노소나타 제30번은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잃은 시기에 작곡한 후기 소나타중에 하나로 절망과 상실을 치유해 나가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에너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연주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연주자는 두 번, 세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청중의 열광적인 박수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앙코르를 갈망하는 박수 소리는 연주자를 거듭 다시 불러내기를 반복하다 결국 다시 피아노 앞에 앉히고 말았다. 가벼운 연주로 답례한 연주자는 다소 지쳐 보였다. 처음과 다름없이 흐트러짐 없고 신사적인 몸짓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박수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청중과 연주자의 우아한 밀당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미련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음악은 지성과 교양을 요구하지 않고, 영혼만을 요구한다.’ 헤세는 아름다운 영혼의 천재다. 음악의 맑고 비범한 선율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감각을 알아차림 한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순간이다. 나의 호흡을 보듬어 주고, 흔들어 깨워줄 선율에 기대어 있는 그대로 느끼고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대 위 선명한 조명 뒤로 객석의 어둠은 마치 깊은 물속 같다. 아득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물결을 따라 온전히 지워내고 비워내고 난 후에야 저 멀리 떠나보낸 다정함과 용기를 불러낼 수 있다. 또 한 번 숨을 한껏 모아 마셨다 후 하고 몰아 쉰다. 베토벤 음악과 은은한 숨사이 선명해지는 무언가를 느끼며 내 영혼의 크기는 생각한 것보다 훌쩍 더 커졌다는 생각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환하게 밝혀진 공연장을 가볍게 빠져나왔다.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아! 끔찍하게 지루하겠지!”

이 세상에 음악이 없다면, “아! 현기증 난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