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지키다.

by Re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이미 책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이 책을 좋아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때가 있다. 다음 페이지를 읽는 대신 잠시 책을 덮어두고 마음의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제일 화창한 하루를 정해 동네 근처 조용한 나무 벤치에 자리 잡고 조금씩 느리게 아껴읽는 독서의 즐거움은 느닷없이 드물게 찾아온다. 굳은 마음을 쿡쿡 찌르며 온 감각을 삐죽 서게 만드는 글, 처음 책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순간은 한 권의 책을 뚜렷한 감각들과 함께 생생히 기억하게 만든다.

클래식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역사적으로 인간적으로 모든 지적 즐거움을 충족시켜 줄게!’하며 본격적으로 선언하는 것만 같은 ‘사람은 많이 읽고 많이 배우고 경험하는 만큼 성장한다.’는 클리쉐를 완벽하게 깨부수어 버리는 명작을 만나면 어느 때 보다 가슴이 뛰고 몸과 마음이 느릿해진다.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의 자잘한 디테일을 기억하고 햇살의 깊이, 바람의 결, 공기의 온도까지 과거와 현재를 미묘하게 연결하여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쑥불쑥 내 인생에 끼어드는 영화 같은 장면들. 우리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지만 과거 한 순간의 나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새로이 느낄 수 있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선명해지는 것을 보면 모든 과거는 언제든 마음먹은 대로 새로이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길고 긴 인생의 필름 앞 뒤를 컷 하여 오직 이것들만 한데 모아 간직해 둔다.


계절의 바뀜은 책을 묵직하게 만들고 마음도 비장하게 만드는데,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을 덤덤하게 들고 여유롭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손끝이 시려오고, 따뜻한 차를 내리고, 부드러운 니트와 가벼운 코트를 꺼내 입을 때 내 손에 항상 들려 있던 책 한 권, 실재하지 않지만 생생한 이미지로 각인되는 인물과 장면들,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미소 짓게 만들어줄 특별한 책 한 권은 언제고 불쑥 내게 말을 걸어주리라.


2025년 10월,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그녀를 지키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들은 서른둘이다. 1986년 이 가을날, 여전히 수도원에 기거하는 서른두 명. 수도원은 낯빛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아찔한 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했다. 천 년이 흐르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길의 깎아지름도 , 그 아찔함도, 서른두 개의 굳건한 마음과 - 허공을 굽어보는 곳에서 살려면 그래야만 한다. - 젊어서는 마찬가지로 굳건했던 서른두 개의 육신. 몇 시간 뒤면 그 수가 하나 줄 터이다. 수도사들이 세상을 뜨려는 이 주위로 둘러서 있다. 사크라 수도원이 그들 키를 훌쩍 넘는 담장을 올린 이래로, 이처럼 빙 둘러서서 수도 없이 작별을 치러 왔다. 은총의, 의심의 순간을, 다가오는 그림자에 맞서듯 활처럼 흰 육신의 순간을 수도 없이 맞았다. 또 다른 떠나감이 있었고 있을 터라서, 그들은 지긋하게 기다린다.’


바티칸이 피에타 석상을 사크라 수도원 지하에 유폐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스러운 사연은 왜소증을 가지고 태어난 12살 어린 소년 석공 미모의 삶을 통해 하나씩 베일을 벗는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던 이탈리아 명문가 오르시니가문의 딸 비올라와 미켈란젤로보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길 바랐던 미모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억압과 비탄의 사슬을 끊어내려 애쓰는 동안 평화로운 소도시 피에트라달바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전에 읽은 문학작품과 또 다른 색감과 농도로 다가와 이렇게 잘 쓰인 책을 다시 만난 기쁨을 소년과 소녀의 무덤덤하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애틋하고 진솔한 고민에 기대어 묵직한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묵묵히 즐길 수 있었다. 간간이 심호흡을 하며 멈춰 섰던 순간, 온당치 않은 세상과 헛된 마음 그리고 추한 말과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도피처 삼아 한참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미모의 마음, 미모의 마음이 자꾸 와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밑줄은 긋기보다 자주 살며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본 횟수가 늘어난 것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텍스트들이 들리고 보이는 생생한 이야기로 시간이 흐를수록 진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이 책과 이 순간을 어떻게 회고하게 될지…이탈리아 여행을 미루고 미루었던 젋은날의 주저함과 분주함이 이탈리아 소도시 피에트라달바의 오렌지나무 가득한 풍경 속에서 무겁고 아쉽게 어른거렸다.


파리를 다녀온 뒤 운명적으로 만난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그랬고, 퇴근하자마자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옆구리에 끼고 가슴이 터질 만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높은 하이힐이 무색하게 집으로 한 걸음에 내달렸던 그날이 그랬고, 빛이 새어들 틈 없는 어둡고 작은 방 안에서 웅크린 채 집요한 상념에 빠져 스스로 영혼을 지워버린 나와 마주한 장 그르니에의 <섬>의 문장들, 프레드 울먼의 <동급생>을 읽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순간과 끝끝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해답 없는 무기력함을 직접 거두어 내고 아름다운 느림으로 채워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기습적으로 다가와 묵직하게 내려앉은 배수아의 모든 문장과 순간들……그리고 또 한 권

우연히 펼쳐 든 한 권의 책으로부터 소환되는 내밀하고도 근사한 기억들 그리고 나의 순간들! 언제나 너무나도 자연스레 연상되는 책들은 앞으로도 내 곁에 있을 것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