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체력은 어느 하루에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은 반복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 발목을 스치는 바람, 몸 깊은 곳의 게으름을 깨우는 첫걸음. 이 모든 것이 이름도 없이 쌓여 어느 날 문득 속도로 피어오른다. 심장의 쿵쾅거림은 예고 없는 불안에 더 가까운 징후이지만, 기분에 흔들리지 않고 욕심을 품지 않으며 일정한 속도로 호흡을 고르며 달릴 때 심장의 떨림은 나를 잊은 채 흘러가던 진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날의 나를 정확히 드러내곤 한다. 처음의 몇 걸음은 누구에게나 벅차지만 달리기를 하면 할수록 이 초반의 소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저 지나가는 풍경처럼 받아들이고 몸이 스스로 균형을 찾을 시간을 주기만 하면 된다.
집을 나서면 특정한 방향을 정하기 보다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걷기 마련이지만 어떤 날은 꼭 이 길이어야만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보통이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발이 익숙하게 기억하는 길, 자연스레 반환점이 있는 동백섬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걸음의 결이 달랐다. 마치 내 안의 어떤 힘이 방향을 틀어놓기라도 한 듯, 나는 걷기의 브레이크가 유난히 고되고 뻣뻣하게 느껴지는 미포 쪽으로 몸을 꺾어버렸다. 나는 어느새 도시의 속도를 벗고 나만의 리듬을 조금씩 찾아간다. 사람들 사이로 스치는 바람마저 서두르지 말라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듯하다. 길이 미포로 이어질수록 풍경은 더 따뜻하게 열린다. 바다는 시시각각 색을 바꾸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막 구워낸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드는 공기들, 철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 위로 낡은 시간들이 은근하게 포개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버티던 것들이 조금씩 풀려 흘러나가는 느낌. 붉은 등대와 하얀 등대가 서로를 바라보는 청사포의 풍경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만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감정의 결을 깨우고, 그제야 멈춰 선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발걸음은 일정한 속도로 땅을 딛지만, 마음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과거와 미래, 기억과 욕망, 상실과 기대 사이를 맹렬하게 건너뛰고, 발의 감각과 주변의 풍경이 어느덧 흐려지면 우리는 자신이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잠시 잊게 된다. 걷기로는 부족하고, 멈춰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몸은 먼저 땅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발바닥이 바람을 밀어내고, 호흡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은 오래 미뤄둔 어떤 결심처럼 울린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걷기와 달리기 사이, 마음 한쪽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조용히 튀어 오르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케이시 애플랙 주연의 <맨체스터 바이 씨>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영화의 중심에는 결코 폭발하지 않는 깊고 건조한 상실의 지층을 가진 주인공 ‘리’가 등장한다. 형 조가 심장 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리는 보스턴에서 고향 맨체스터로 돌아온다. 그는 잊을 수도 없었고, 지울 수도 없었던 과거의 그림자가 스며든 이 도시를 오래도록 외면해 왔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음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서만 견딜 수 있는 삶, 미세하고 작은 움직임들이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 속에서 나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과 뒤엉켜 버린 슬픔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리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잔해들을 몸에 달고 골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누구를 쫓는 것도, 누구로부터 도망가는 것도 아닌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는 속도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리의 뒷모습이 스크린 저편에서 흔들릴 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혼란과 침묵의 모양이 오래전부터 내 안에도 겹겹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매일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달리기를 해왔고, 악으로 4km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체력에 자신감도 붙어가던 중이었다. 물론 며칠 게을러지면 다시 돌아갈 모래성 같은 체력이지만. 생각의 무게가 순간적으로 가벼워지고, 세계가 나를 향해 한 뼘 정도 가까워지며 “지금이야” 하고 조용히 귓가를 건드리는 순간. 걸음에서 달음으로 바뀌는 찰나는 생각은 따라오지 못하고 몸이 먼저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이다. 발바닥이 땅을 두드리는 일정한 리듬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얼마나 흔들리는 존재인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얼마나 쉽게 다시 일어나는지를 배운다. 뛰기 시작하면 모든 생각이 흐트러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한 줄기만 남는다. ‘지금 여기에 숨 쉬고 있다는 것.’
멀리 송정 솔밭의 깊은 초록과 바다의 투명한 청색 사이 아련한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은 슬퍼서도, 아파서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참아온 것들이 호흡의 벽을 넘어 밖으로 밀려오는 순간에 몸이 먼저 흘리는 작은 항복 같은 것이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우리 가족은 다섯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온전한 가족 다섯 명만이 함께 했던 봄나들이, 가장 평평하고 그늘진 곳을 찾아 아빠가 펼쳐두던 작은 돗자리. 그 기억 속의 바다는 늘 잔잔했고,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하루를 통째로 잃어버릴 만큼 오래 웃었다. 보자기로 싸 온 3단 찬합에는 그때도 역시 최고였던 엄마의 김밥이 가득했고, 과일 후식까지 챙겼다. 단짠단짠 과자랑 달콤함 음료수, 바람 사이로 섞여오는 다정한 말들, 환한 웃음들, 솔밭의 초록은 여전히 묵직하고, 바다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파도를 보내왔다. 그 위에 세월이 쌓여도, 우리의 추억은 모래처럼 깊숙이 스며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추억이란 아름답게 남아서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두 감정이 동시에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그 모든 순간을 껴안고 있을 수 있는 곳 — 오늘의 바람을 들이마시며 그곳을 향해 달려오고 싶었을까. 가족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고, 그저 다른 형태로, 다른 계절로, 다른 속도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