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다닌 회사를 떠나며 - 회사에 남기는 제언

굴지의 대기업을 다녀 보고 느낀 점들 그리고 남겨야 할 말들

오랫동안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던 국내 최고의 대기업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일이 다가오면서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돌고, 결국 퇴사 당일에 회사 게시판에 글을 하나 쓰기로 했다.

아래는 퇴사일에 게시판에 남긴 글의 전문.



10년 다닌 회사를 떠나며.


떠나기 전에 무슨 궁상맞을 일인가 싶지만, 회사에 애정이 남았단 생각에 그간 재직하며 경험했던 본 회사의 장/단점들과 해결과제를 적어봤습니다. 포인트별 사례를 모두 붙이진 못했으니 high level로 봐주세요.


1. 퇴사한 전 동료들이 칭찬하는 회사

- “그래도 이 만한 회사가 없다”고 의견을 주는 사람이 많다.

- 회사의 장점은 떠나기 전까지는 잘 체감이 안되고 그래서 사내에 비판적 시각이 다수임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합니다.


2. 회사가 주는 안정성 때문에 이직이 예상보다 힘들다

- 다른 회사와 비교해도 회사가 주는 것들이 나쁘지 않다.

- 반대로 적극적으로 이직을 하려는 사람도 타회사 대비 적다.

- 이직을 하려면 외부의 기회를 열어놓고 본인 실력을 꾸준히 테스트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Top-down은 빠른 회사인데 Bottom-up은 매우 느림

- 임직원의 engagement가 고객의 그것만큼 중요해진 현재, Bottom-up이 되지 않는 회사는 갈수록 도태될 수밖에 없다.

- 게시판에 꾸준히 올라오는 여론과 민심이 정책이나 경영에 반영되는 속도가 정말 느리다.

- 10년 가까이 같은 문제 (e.g. 단기적 성과 집착, 개발자 갈아 넣는 문화, 타회사 대비 임금 역전 현상)가 반복 제기되어도 계속 바뀌지 않는 것들은 임직원 VOC 체계가 부재하거나 고장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도 생각보다 빠르지 않다

- 높은 직급의 임원도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개인의 힘으로 어젠다 세팅을 할 구조적 권한과 능력이 없음. 여론에 떠밀려야 뒤늦게 행동하는 사례.

- 예: 코로나 사태 장기화에도 IT기업임이 무색하게 재택근무 및 비대면 업무환경 보급에 십 수개월이 걸림


5. 패스트 팔로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 혁신을 지향하나 혁신에 필수 동반되는 리스크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혁신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끝남.

- 미래를 내다본 아이디어와 제안들은 채택되지 않고, 오히려 현자적 시각을 제시한 사람을 깔아뭉게는 경우를 본 적이 꽤 있습니다.

- 도전과 시도 자체를 환영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 리스크 테이킹을 해서 성공하지 못했을 때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워 손가락질 받아본 사람은 더 이상 나서지 않는다.


6. 인사적체가 매우 심하고 젊은 인재가 수혈되지 않아 회사는 활기를 갈수록 잃어버리는 중

- 현 대한민국의 역피라미드 연령구조를 뛰어넘어 회사 내 젊은 인재는 계속 고갈 중.

- 다른 회사에서는 8~10년 차면 파트를 꾸리기도 하는데 이 회사에서는 막내들이 즐비하지요.

- 새로운 도전이나 대담한 시도보다는 기존의 방식의 반복. 리스크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트렌드에는 계속 뒤처지는 현상이 강해집니다. (예: 제품의 Key buying factor로 여전히 H/W 스펙 위주로 강조)

- 대학생 선망기업 1위 자리를 뺏긴지는 오래고 있던 젊은 직원들마저 떠나는데 아직까지도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7. 보이는 문제에 대해 직원들이 입을 닫기 시작하면 회사는 곧 망한다

- 회사 입사 초기보다 애정 어린 충고나 조언을 하는 글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습니다.

- “절싫중떠”와 같은 사조를 퍼뜨리는 것만큼 회사 분위기 자정작용을 해치는 게 없습니다.


8. 보안으로 지켜지는 자산 가치만큼 비효율로 발생하는 비용 또한 심각하다

- Work Smart를 저해하는 폐쇄형 정보관리

- 사내 정보의 흐름 자체를 모두 통제하겠다는 시각. 정보가 조금이라도 공유될만한 툴을 전부 차단. 외부와 연결되거나 모바일 접속되는 클라우드, 협업 툴 전부 금지. 슬랙 모바일 차단. 예외적 허용 절차도 매우 까다로움.

- PC 사내 메신저에서 사진 공유 금지.


- 무작위로 추출한 듯한 키워드들을 기준으로 외부 발송 메일 본문에 포함 시 일괄 차단 (예: ”주소록” “경쟁사” 단어 포함 시 메일 자동 차단)하여 외부 업체와 커뮤니케이션 시 발송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 특히 수정이 안 되는 pdf 문서는 랜덤 한 키워드에 걸려서 공유할 수 조차 없다.

- 보안 사고마다 생기는 새로운 규제들은 재발방지만을 위한 행정편의적 특성으로 인해 규제가 업무에 주는 지장과 비효율적 관점은 결여

- 극보수적 보안 규정으로 인해 직원들이 업무 중 쓸데없이 낭비한 비용을 시간의 총량 X 시급으로 계산해보면 연간 비용이 최소 수천억 규모 예상.


9. 성과가 있는 곳에 보상이 부족하며, 경쟁사 대비 보상의 상대적 빈곤의 심화

- 파격적 보상이 주어지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젊고 유능한 인재를 계속 뺏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 입사 때부터 인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임직원에게 파격적 보상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도입됐는지 체감을 하는 임직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회사의 적극적인 임금 상승률 제한으로 지난 10년간 주요 기업보다 임금 수준이 하락하고, 최근 2년간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나서야 수습한 전례가 있습니다.

- 일본식 사명감에 기반한 무보상 시스템은 실리콘벨리식 파격적 보상 체계에 의해 결국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인센티브는 주지 않으면서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요즘식 표현으로 '주인이 하인에게 하는 가스 라이팅'으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10. 자발적 퇴사자가 왜 떠나는지 회사는 방치하고 있습니다.

- 자사 제품을 떠나는 로열 고객들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면서, 회사는 떠나는 인재들을 제대로 잡지도 왜 떠나는지 심층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 회사가 위기라면 정답은 퇴사자들에게 있습니다.


비판만 한 것 같아 제언 몇 가지만 적어 봤습니다.

- 쓴소리를 하고 조언하는 임직원의 말을 회사는 적극 경청하되, 경청에서 끝나지 말고 주요 안건에 대해서는 후속 대책을 마련해서 직원에게 끈질기게 공유한다.

- 조직을 개선하는 좋은 아이디어와 실현 안을 내는 경우에는 보직장뿐 아니라 안을 제공한 당사자에게 파격적 보상을 제공한다.

- 혹 어떤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손가락질하지 않는 문화를 조성한다.

- C-level에서 “직원의식”을 가지고 직원들의 통점을 읽어내고 (최소 노력을 보이는) 해결방안들을 제시할 수 있다.

- Work Smart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 관점에서 보안 규정들을 재검토하고, 병목을 심화하는 규제 사항들은 축소 관리한다.

- 동기-위생 이론 등에 근거해서 전/현 재직자 대상 만족도와 불만족도 critical factor를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는다.



이렇게 말해도 바뀌는 게 하나라도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남겨봅니다.


재직자 분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룰러 좋은 회사가 더 좋은 회사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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