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MBTI만을 가지고 자신의 성격을 단정 짓는다면 그 범주에 들지 않는 또 다른 본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데 두려움이 앞설 수 있다. 또한 성격 유형 검사보다 더 넓은 의미인 세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틀이 정해져 있는 삶은 여러 감정의 표출과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황야의 이리>는 이러한 영역을 탐구하며 삶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논한다.
하리 할러의 삶: 고독한 이방인
주인공 하리 할러는 지식인이며 고독한 은둔자이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현실을 경멸하지만 동경하는 마음 역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을 삶의 애매함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이 궤도를 이탈한 자신에 비하면 그들이 옳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예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우울감에 휩싸인 자살자이기도 하다. 그가 표현하는 자살자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의 안정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면 나는 문을 열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라는 그의 철학은 평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 삶의 고통 너머에는 죽음이 있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얻는 그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인간의 특성: 이원론적인가 다면적인가?
그는 인간을 이원론적 존재로 생각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인간’과 ‘이리’가 있다. 여기에서의 인간은 ‘시민적 자아’와 같다. 이 안에는 정신적인 것, 혹은 교육받은 것과 같이 일반적이면서도 사회 규범에 들어맞는 인간의 특징이 담겨 있다. 반면 ‘이리’의 경우 이와 반대되는 특성이 있다. 모든 충동적이고 야성적인 것, 혼돈적인 것들은 이리의 영역에 쑤셔넣는다.
이분법적 특성으로 인해 하리는 늘 자신의 두 가지 자아와 갈등한다. 그가 도덕 관념과 시민의식을 잘 준수했을 시에는 언제나 이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그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었고 그로 인한 혼란과 고조된 절망은 항상 그를 따른다.
사회인으로 살아가며 인간이 페르소나를 지닌 것은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주위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틀이 잡힌 공동체 사회 속 자신의 모습과, 익숙한 환경에서 친밀한 사람과 있을 때 나오는 모습이 다르다고 우리가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상황에 따라 인간 내면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지한 태도이다. 오히려 후자의 상황처럼 편한 환경 속 자연스러운 상대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하리는 이분법적 특성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의 중립적인 성격을 분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판단하는 인간도 양자택일의 범위에 놓여있다. 그가 추구해온 삶과 배제해온 삶은 그 경계가 명확했기에 그의 삶 또한 언제나 경직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할 수 없었다.
헤르미네와 파블로: 향락과 쾌락의 삶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낯선 술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헤르미네는 하리에게 함께 춤을 출 것을 권하지만, 스텝조차 밟지 못하는 하리를 보게 된다.
삶과 내면의 다원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 채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것은 타락의 공간으로, 대학을 다니며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정상적 범주에 넣은 그의 내면은 철저한 이분법적 삶을 짐작게 한다. 이는 그가 삶을 고통이라고 표현한 것을 수긍하게 만든다.
그는 헤르미네가 말한 가벼운 것들, 이를테면 안경을 닦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것 혹은 바지를 수선하는 것 등을 할 줄 몰랐고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것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억압되어 있었으며 가벼움을 즐길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그로 인해 춤도 전혀 못 추면서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냐는 헤르미네의 질책에 하리가 특별한 변명을 못 하는 것은 그가 그동안 느낀 내면의 분열,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에 분명한 확신조차 없었음을 드러낸다.
작품 속 헤르미네는 하리 할러의 조력자 같은 존재이다. 하리가 무조건적으로 배제해온 향락적 삶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리에게 유행하는 춤을 가르치고 친구인 파블로와 마리아를 소개해 준다.
하리는 아름다운 마리아와 쾌락적이면서도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맛보게 된다. 타락과 쾌락으로 이루어진 삶을 밀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있었던 그에게 이 세상은 가벼운 마음과 태도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었다.
마술 극장: 개성의 함몰과 자유로움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절정 단계는 하리 할러가 파블로의 마술 극장을 체험하며 보는 자신의 모습과 성찰이다.
헤르미네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몸소 느꼈지만, 지식인의 삶을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 내면의 이원론적 분류에서 벗어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헤르미네는 그런 그를 마술 극장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지금 마술 극장에 있는 겁니다. 아름답고 명랑한 형상들을 찾아내 보세요. 그래서 당신이 정말 더 이상 당신의 애매한 개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세요.”
마술 극장 속 거울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안에서 그는 ‘나’라는 통일적 인간이 수많은 자아로 분열된 현상을 목격하고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괴테를 만나기도 하며 모차르트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에게 무수히 많은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삶을 관조와 유희로 살 것을 권유받는다.
인간의 개성이 함몰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에게 사람은 특정한 형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세상에는 추한 것을 비롯한 허영심 등이 언제나 즐비하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삶으로 여기고 이념과 현실 사이에 그것들을 적절히 끼워 넣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무겁고 비장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유머를 통해 가벼운 마음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수용한다.
헤르만 헤세(H.H)와 하리 할러(H.H)
결국,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생을 지나치게 무겁게 살며 삶과 투쟁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적 성숙에 귀 기울이며 삶을 유희적으로 관조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헤세가 자신에게 투영하는 모습과도 비슷한데, 이 작품 속 주인공인 하리 할러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현신(現身)이라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두 인물의 이니셜이 H.H로 일치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특히나 작가의 고백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황야의 이리>는 헤세가 50세가 되던 해 집필한 책으로 인생의 중간 지점 속 삶과 내면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해보는 태도를 지닌다.
학교를 이탈하고 자살 기도를 했던 청소년기,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군입대를 자원하지만 부적격 판정을 받는 30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생긴 우울증으로 다락방에서 홀로 은둔자의 나날을 보낸 40대와 같이 헤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동안 쓴 작품들 역시 그의 존재를 투영하거나 그가 분신이라고 여기는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 헤세의 자전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헤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크눌프>까지.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통해 인생의 여러 어려운 시간을 지나 자신의 정신적 위기를 유희로 극복하고자 한 그의 사고를 표출해냈다.
그의 고된 삶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만큼 헤세의 작품은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복잡하고도 어려운 그의 작품이 한 세기를 지나도 끊임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삶에서 거쳐 가는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자기성찰을 통해 성장에 다다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헤세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과도 일치한다. 그는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정해 주지는 않았지만, 결국 독자가 작품을 통해 치유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헤세의 바람대로 <황야의 이리>의 하리 할러 역시 내면 속 분열의 해결을 위한 탈출구에 다다른다. 그것은 삶에서 비롯된 여러 무거운 일과 자신의 부족함을 태연하게 인정하고 보다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런 것들을 유머와 유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갖 비장함과 굳은 각오로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닌, 유희와 가벼움으로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를 만들어내는 주체도 자기 자신이다.
이에 하리는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삶을 계속 살아낼 용기를 얻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세상의 고통을 맛보고 마음속의 지옥을 헤매고 싶어한다. 자살자로 살아가며 삶을 끝낼 때 진정한 행복에 다다를 것이라고 여기던 그가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해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존재할지라도 유희를 통해 극복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책을 통해 본 하리의 내적 분열은 어쩌면 삶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보상심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으로서 멋있는 삶을 살고자 부정적이라고 여겨진 향락과 타락의 삶을 밀어냈고 지식인으로서 다양한 배움을 추구하며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에 삶의 방향을 잃고 부유했을 것이다. 사랑과 증오는 한 끗 차이라는 말처럼 세상에 큰 애정과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오히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테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라고 되뇌던 그의 모습에 작은 기대를 거는 이유는 그가 분열된 자아와 화해할 것이라는 전망과 고통스러운 삶을 웃음으로 극복해 낼 다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이 바라는 삶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매 순간이 좋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나가는 것을 보면,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 세상의 다양한 불안과 고통을 기꺼이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