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가 사는 곳은 경기도다. 경기도 하안동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막상 가보니 큰형내외에 딸린 아이들 다섯과 홀시어머니, 막내시동생까지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남편의 큰형인 상기의 첫 부인은 아이 셋을 낳고 병사(病死)로 세상을 떠났고 새로 부인을 들여 아이 둘을 더 낳고 살고 있었다. 상기는 지독한 술주정뱅이였는데 그 때문인지 간암에 걸렸다. 상기가 아파서 거동을 못하자 새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을 두고 도망쳤다. 자연스레 병수발도 순자의 몫이 되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퇴원을 권유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닫아둔 상기의 방문 안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대문 앞까지 들렸다. 복수가 차올라 숨도 잘 못 쉬며 괴로워하던 상기는 한참을 앓다가 죽었다.
순자네 부부를 제외하고도 주렁주렁 군식구만 일곱이었다. 집에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다. 가난하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순자는 기가 막혔다.
처음 몇 달은 친정엄마가 시집갈 때 팔아준 보리쌀 몇 말로 근근이 버티었다. 그마저도 줄줄이 달린 군식구들 입속으로 다 들어가 얼마 못 갔다. 윤기를 설득해 집을 고쳐 세를 놓고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나갔다. 메밀묵도 쑤어서 팔아보고 남대문에서 옷을 떼다가 옷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옷도 팔았다. 종일 무거운 봇다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 저녁때에는 목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내려놓아도 머리에 보따리가 올라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임신을 하게 되어서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을 때 윤기가 퇴근길에 리어카에서 파는 귤을 한 봉지 사다가 부엌에 찬장 선반에 말없이 올려두고 순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자네 입덧 심하다니까 주변에서 신 것 좀 사다주라 해서 귤 좀 사다 놨어. 누가 보면 다 나눠먹어야 하니까 자네 혼자 있을 때 하나씩 까먹어"
"아.. 마침 신게 땡겼는데 고마워요" 저녁을 먹고 다들 자러 가서 조용한 시각 순자는 윤기가 일러준 선반에 손을 뻗어보았다. 근데 아무리 뒤져도 귤은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가져다가 날름 먹어버린 걸 이튿날이 돼서야 알았다.
'참말로... 너무허네...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배고픈 시절이라지만, 자기 손주 가져서 입덧하는 며느리 먹을 걸 탐낸다냐...'
순자는 뭐라 말도 못 하고 탄식만 했다. 시어머니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삐지기도 잘 삐져서 순자는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메밀묵을 쑤어서 팔면 돈은 시어머니가 가져갔다. 집에 식구들 먹을 묵 한 조각 남겨두지 않고 가져가서 모두 팔고는 입을 싹 닦았다. 윤기가 딱히 나서지도 해결해 주는 것도 없었기에 그저 순종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첫 딸을 출산했다. 워낙에 못 먹은 탓에 아기도 작았고 출산 후에도 산후조리를 못하고 매일 고된 일을 하러 나가자 순자는 아프기 시작했다. 순자가 먹지를 못하니 아기도 젖을 실컷 빨지 못해 늘 보채고 울기만 했다. 순자는 송장 마냥 누워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누워있으니 윤기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친정에 전보를 쳐서 금례가 헐레벌떡 올라왔다.
"아이고 내 새끼 고생했다. 근디 워쩐다고 이렇게 말랐다냐?! 쌀이 없으면 전보라도 치면 엄마가 보태주잖여! 자네는 대체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뭐 했는가? 사돈은 뭐더셨소? 산모가 이렇게 못 먹으면 뭐라도 해서 먹여야 안 허요. 내 새끼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여!?"
금례는 방 한쪽에 앉아 있던 순자의 시어머니와 윤기를 번갈아 보며 일갈했다. 양심은 있는지 말대꾸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두 모자의 모습에 금례는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딸을 다시 쳐다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친정에서도 그렇게 일만 하고 고생만 해서 시집가면 좀 덜하겠지 하고 보냈던 금례였다. 가난해도 그럭저럭 두 사람 입에 풀칠은 하고 잘 지내고 있을 줄 았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군식구들을 보니 왜 순자가 이렇게 말랐는지 알겠던지라 금례는 이를 악 물었다.
서둘러 올라올 때 가져온 쌀로 죽을 끓여 순자 입에 넣어주었다. 그 와중에도 먹을 거 생겼다고 주방 기웃거리는 사위의 군식구들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금례는 혀를 찼다.
며칠을 옆에 딱 붙어 먹이고 건사하니 이제 일어나 앉기도 하고 혈색도 돌아온 순자에게 금례는 결심한 듯 말했다.
"가자! 집에 내려가서 좀 쉬다 오게 응? 너 이러다 죽것다. 따라나서거라."
"엄.. 마.. 흐흑..."
그동안에 참아내고 꾹꾹 눌러놨던 설움과 그리움이 목구멍을 꽉 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했다. 눈만 뜨고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던 순자는 그렇게 금례 손에 이끌려 아기와 함께 정읍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