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가 태어난 후 4년 동안 아기 소식이 없어 시어머니의 눈치와 구박 아닌 구박을 받던 금례는 4년 만에 첫아들 순철을 낳았다. 순자의 할머니는 순철을 애지중지 대했고 먹을 것만 있으면 감춰두었다가 순철을 몰래 먹이곤 했다. 어려운 시절인 지라 주로 보리밥만 먹었지만 어른들은 쌀밥 반. 보리밥 반을 밥그릇에 올려드렸는데 할머니는 그 쌀밥 반절은 남겨 아랫목 이불속에 넣어두었다가 순철이 돌아오면 몰래 불러 먹이곤 했다.
어느 날 그런 할머니의 편애를 눈치챈 순자는 아랫목에 숨겨둔 쌀밥을 몰래 싹 먹어버리고 빈그릇만 아랫목에 넣어두었다. 순철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할머니는 숨겨둔 쌀밥을 얼른 몰래 주려고 아랫목을 더듬어 밥그릇을 꺼냈는데 빈그릇만 덜렁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순자가 먹어치운 것을 눈치챈 할머니는 노발대발했다. 빗자루를 찾아들고 순자 뒤꽁무니를 쫓기 바빴다. 순자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끊임없이 홍시나 곶감 같은 간식들을 순철을 위해 숨겨두었다. 오기충만한 순자는 굴하지 않고 할머니의 보물창고를 털어먹기 일쑤였다.
태양이 벌겋게 이글거릴수록 고추밭의 고추도 붉어진다. 오늘은 빨갛게 익은 고추가 썩어버리기 전에 따야 했다. 순자는 먼저 고추밭에 나간 부모님 대신 새참을 가지고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일하러 빨리 안 나가냐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뭐 헌다고 미적대냐? 미적대길! 고추도 못 달고 나왔으면 빨리빨리 움직이기라도 혀야지! 느려터져서는......"
순자는 늘 할머니가 아들만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섭섭했다.
'그 아들들이 학교에 가면 농사일이랑 집안일은 내가 다 하는데 나한테는 좋은 소리도 한번 안 해주시고 타박만 하네... 칫...'
가만히 생각하니 불뚝 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 혼잣말로 순자를 타박하던 할머니가 들고 나오는 요강 단지를 잠시 툇마루 위에 내려놓은 사이 순자는 용심이 솟았다.
'할매! 나 학교도 못 가게 했지?'
심술을 발끝에 모아 요강 단지를 뻥 차버렸다. 잠시 걸레를 찾던 할머니는 땡그렁 거리며 마당 한가운데로 데굴데굴 굴러간 요강단지를 쳐다보고 순자를 향해 걸레든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야 이놈의 가시내야!"
"메롱"
순자는 혀를 쏙 내밀고는 얼른 달음박질하니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도 늙으시니 별거 없네라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할머니를 피하느라 급하게 손에 들고 나온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고추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도망치는 순자의 뒤로 아픈 다리를 짚고 어기적거리며 요강을 주우러 나오는 할머니가 보인다.
"쯧쯧, 저 가시내가 언제 철이 들렸는지 원...."
요강을 주워 일어서다 보니 고무신도 짝짝이로 신고 나온 게 보였다.
'손주 때려잡느라 급하긴 급했네..'
실없이 웃음이 났다.
추수가 끝나고 한가해지면 순자는 여기저기 마실도 다니고 친구들과 우렁도 잡고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기 바빴다. 한철 고되게 밭일이며 살림하느라 바빴던 금례도 이때는 한시름 놓고는 아낙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도 하고 읍내 구경을 다니기 바빴다. 순자가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니 할머니는 침침한 호롱불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미친 가시내들... 지애미가 미치니께 가시내도 미쳤어...... 사기그릇하고 요강단지는 밖으로 내돌리면 깨지는 것인디... 가시내들이 뭐더러 이렇게 돌아댕겨 댕기길! 지애미하고 가시내하고 둘 다 미쳤지! 미쳤어... 쯧쯧..."
순자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혼자 중얼거리는 할머니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시끄러!"
냅다 소리를 지른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다! 이노무 가시내야!"
화들짝 놀란 할머니는 하던 바느질을 내팽개치고 빗자루를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너 이리 와! 언능 이리 안 와야!?"
깔깔거리며 순자는 다람쥐처럼 후다닥 튀어올라 문을 박차고 툇마루로 도망간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할머니는 빗자루를 잡고 쫓는다. 순자는 할머니 곯려먹는 재미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주거니 받거니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깊어졌다.
여름의 한가운데 더위에 지친 할머니는 모시적삼을 입고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았다. 대청마루에 앉아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더해 부채질을 한다. 먼 곳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매미 우는 소리를 듣고 있다. 옆에 앉아 이를 가만히 보던 순자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왜야..."
돌아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할머니는 슬프것네?"
"... 내가 왜 슬퍼야?"
그제야 의아하다는 듯이 순자를 바라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할머니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슬프지!"
"야이 미친 가시내야! 저노무 가시내가 쓰잘 떼기 없는 소릴 지껄이네! 너 이리 안 오냐?"
노발대발한 할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도망가며 웃는 순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셨다. 순자는 그런 할매가 이제는 무섭지도 않고 좋았다. 할머니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날 잠결에 눈을 뜬 순자는 할머니가 앉아 책을 찢어 땀을 닦아내는 모습을 보았다. (휴지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 대신 못쓰는 책을 찢어 바닥도 닦고 뒷간 볼일도 해결했다.)
할머니의 이마에 앵두같이 큰 땀방울이 송글송글 한없이 맺혀 할머니가 정신없이 땀을 닦는 게 이상해 보였다. 얼른 방문을 열고 나가 엄마가 주무시는 안방에 대고 소리를 쳤다.
"엄마! 엄마! 아부지! 할머니가 이상해!"
갑수와 금례가 서둘러 순자와 할머니의 방으로 왔다.
"왜... 할머니가 왜?"
순자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할머니의 등뒤로 가서 할머니를 부르며 붙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왜 그래!?"
눈동자가 풀린 할머니는 순자를 스윽 돌아보며 한숨을 내뱉더니 그대로 스르륵 누워 잠이 들었다. 저녁 무렵 할머니는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순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직면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빗자루를 들고 순자를 쫓아올 것 같은 얼굴로 할머니는 그렇게 누워있었다.
삼일장을 마치고 할머니를 산에 묻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꽃상여를 준비했다. 말투는 괴팍했으나 어려운 시기에 이웃에게 각박하게 굴지 않고 베풀었던 할머니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한쪽에 네 명씩 장정 여덟이 붙어 상여를 멜 준비를 하였다. 오색 비단과 종이꽃으로 장식된 상여를 상여꾼들이 들어 올리자 넋을 놓고 있던 순자는 일어서는 상여를 붙들고 가지 못하게 매달렸다.
"할머니! 안돼!! 안돼!! 못가! 우리 할머니야! 가지 마! 할머니! 이제 안 놀릴게... 할머니... 안 돼요! 제발... 엉엉..."
순자가 매달리고 잡아당겨 꽃상여 뒷부분이 너덜거리기 시작하자 지켜만 보던 어른들이 상여에서 순자를 떼어냈다. 그리고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순자를 막고서야 꽃상여는 출상했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 주오~
어허야~디이야아~"
순자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상여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선소리꾼의 종소리와 노래가 울려 퍼졌다.
종이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하얀 명정이 춤추듯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