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이 내린 이른 아침 소여물도 주고 아침 식사준비까지 마치고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간다.
가시내는 가르쳐서 뭐 하느냐며 책보를 멜 때마다 잔소리를 쏟아내는 할머니를 피해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그래도 오늘은 이만하니 다행이다. 매서운 할머니만 피하면 그날 하루는 일사천리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겨울에 들어설 무렵 엄마가 쌍둥이를 출산했다. 이제 순자 밑으로 남동생만 다섯 명이 되었다. 순자는 이 쌍둥이 아기들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엄마가 밭에 나가 일하는 동안 아기들을 돌봐야 한다고 학교를 못 가게 했다. 싫다며 부득불 가방을 메고 새벽같이 도망가는 순자를 막지 못하자 할머니는 기어코 순자의 책보를 숨겨버렸다.
"시답지 않은 가시내를 뭐더러 가르쳐! 가르칠라믄 머슴아들을 가르쳐야지!"
그러고는 둘째 순철에게는
"너는 가거라. 어서 가서 공부해!"
라며 등 떠밀었다. 순철은 누나에게 미안한지 쭈뼛거리면서 고무신을 신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순자는 설움이 복받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옷소매로 눈을 벅벅 문지르며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 나도 학교 가고 싶어! 책보 내놔! 나도 갈꺼야아!"
펄펄 뛰며 울부짖는 순자에게 할머니의 매서운 회초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봄부터 엄마는 순자에게 아기들을 맡기고 밭일을 하러 갔다. 젖 먹을 시간이 되면 밭에 있는 엄마에게 아기들을 데려가야 했다. 한 녀석은 업고 한 녀석은 안고.
9살짜리가 아기 둘을 안기에는 너무 힘들어 나름 잔머리를 굴려본다. 순동이를 내려놓고 순종이를 저만치 나무그늘에 옮겨놓고 순동이에게 돌아와 보니 서럽게 울어댄다. 순자는 우는 아기를 물끄러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저만치 두고 온 순종이마저도 울어제치는 바람에 얼른 아기를 고쳐 안고는 나무 그늘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쌍둥이 갓난쟁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수월해질 무렵 다시 학교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그마저도 일곱째 막내 순미가 태어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막내가 크면서는 못자리하느라 바빠서 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마다 부러워서 울기도 숱하게 울었다. 하교한 동생들에게 오늘은 무얼 배웠는지 어떤 놀이를 했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처음엔 잘 알려주던 동생들도 누나가 자꾸 캐묻는 게 귀찮은지 대충 얼버무려 서운할 때도 많았다. 순자는 마음 한편에 두었던 책보따리를 서서히 지워냈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바쁜 농가일을 돕는 게 장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논에 가서 물을 대고 해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이삭 사이에 자라난 피(잡초)를 뽑았다.
아버지 따라 새벽같이 나오면 순자는 그날은 종일 뺑뺑이다. 갑수는 고지식하고 일을 할 때는 철저한 편이라 순자는 일을 배우면서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조금 쉬려면 저쪽 논고랑에 가서 어느샌가 가서 외친다.
"순자야, 삽 갖고 오니라!"
"아휴.... 네!"
오후 밭일까지 어느 정도 끝나고 나니 순자는 슬그머니 아버지 시야에서 멀어져 밭두렁 밑에 냇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렁이를 잡았다. 아버지 갑수 역시 어머니를 이기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지라 딸을 못 본 척해주고 놀게 두었다. 순자가 동네 또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끼니때를 놓치고 집에 뛰어 들어가면 여지없이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저 노무 가시나가 지금이 몇 신디 인자와?"
등뒤로 들려오는 서슬 퍼런 할머니의 호통에 오소소 소름까지 돋는다. 서둘러 우렁 든 통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숨는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할머니의 불호령에 움찔하는 것도 잠시 눈치껏 재빠르게 움직인다.
순자는 7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나 집안 궂은일부터 농사일까지 안 해본 게 없다. 웬만한 장정들이 할 일을 순자는 척척 해냈다.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순자의 몫은 커졌다. 그래도 엄마 아부지 도와드린다는 생각에 꿋꿋하게 버텼다.
순자의 아부지 갑수는 동네에서 소문난 장정이다. 손끝도 야무지고 못하는 일이 없었다. 순자는 그런 아부지 성정을 고대로 빼닮았다. 선머슴아 같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순자야, 니는 머스마도 아닌 게 무슨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노냐?"
"나무는 머스마만 타란 법 있다냐? 타면 타는 거지 이까짓께 뭐라고."
말을 하면서 성큼성큼 나무 밑동을 밟고 척척 타고 올라갔다.
굵은 가지 둥치에 기대 누워 다리 하나는 건들건들 흔들며 하늘을 보는 게 순자의 낙이었다.
그것도 잠시
"순자야!"
멀리서 또 누군가 순자를 찾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린다.
"어휴..징해, 징해죽것어. 쉴틈을 안 준다냐"
구시렁대면서도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친구들을 뒤로하고 내달린다.
"네! 가요, 가! 아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