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 내려온 날 온 식구가 순자의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순자야! 어찌 이리 마른 게냐? 잘 왔다! 잘 왔어!"
아버지 갑수는 금례의 전보에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던 터라 가슴이 저몄다. 내 새끼 데려다 이렇게 만든 사위가 미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친정집이라고 찾아왔음에도 순자는 쉽게 편한 얼굴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며 쳐다보는 갑수의 등 뒤에서 순철과 그 밑에 동생들이 달려 나왔다.
"누나다! 누나"
"누나 많이 아파?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 어서 들어가자!"
"내가 이불 깔아놨어. 누나!"
"언니! 언니 왜 이제와? 보고 싶었어!"
동생들이 앞다투어 순자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순자는 자신의 행색이 부끄러워 쭈뼛거리던 것도 잠시 금세 가족들의 환영에 병색 가득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마음 편히 누워 친정집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윤기의 집에서는 눕기만 하면 끼니 걱정, 돈 걱정뿐이라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시집가기 전에는 그저 농사일 때문에 지겹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오니 그때는 천국이었구나 깨달았다.
두고 온 윤기와 가족들의 뒷일이 걱정되는 것도 잠시 순자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누나가 왔다고? 어디에 있는데? 어디?"
"쉿! 지금 누나 자.. 조용히 해!"
잠결에 동생 순호와 순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짚어 겨우 앉은 순자가 방문 앞까지 기어서 문을 열어젖혔다.
"큼... 나... 일어났어..."
"누나!!!"
"누... 누나 많이 아파? 얼굴이 그게 뭐야"
"괜찮아... 조금 쉬면 나을 거야"
"순만아, 엄마한테 나 일어났다고 얘기해 줘"
"응, 누나"
순만은 날쌘 걸음으로 본채로 달려간다.
얼마 후 순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릴 때부터 순자의 놀이터였던 동네 느티나무 옆에 앉아 시원한 바람도 쐬면서 익어가는 벼이삭이 바람결에 넘실거리는 걸 구경했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순자도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살던 터전을 벗어나보니 그게 얼마나 평안하고 보람 있는 일들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순자의 딸내미도 금례가 차고앉아 잘 먹인 탓에 살도 오르고 방긋방긋 웃고 잘 놀았다.
순자는 슬슬 윤기가 걱정이 되었다.
"엄마, 나 이제 낫았으니까 집에 갈래, 최서방 혼자서 어쩌고 있나 싶어서 맘이 안 편해."
"너 이제 좀 사람 같아졌는데 그 집구석에 가면 또 아플까 봐 엄마는 못 보내것다. 더 있다가 가야"
"나 이제 암시랑도 안혀, 어지럽지도 않고 밥도 잘 먹잖아!"
"여기서야 잘 먹지! 그 집구석 가면 또 군식구들이 너 하나 못 뜯어먹어서 안달할 건데 어떻게 보낸다냐"
"아유, 엄마도 참! 내가 아기 낳고 잠시 몸이 허해져서 그랬지! 나 그렇게 약골 아니여! 엄마가 더 잘 알자나"
금례는 그 거지 소굴로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정에 붙잡아 앉히고 못 가게 하고 싶었다.
결국 가겠다는 딸을 못 막고 기차역 앞에 데려다주며 금례는 신신당부를 했다.
"혹시라도 또 아프고 그러믄 지체 말고 전보 쳐! 엄마가 가든 아버지가 가든 갈 테니까! 알았지?"
"네네. 알았다니까! 걱정 마셔. 내 깡다구 알면서 엄마는...."
순자는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멀찍이 서서 두 모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순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다녀오라는 인사였다. 과묵하고 호랑이 같던 아버지가 순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자 순자는 더 힘을 내어 웃어 보였다.
"아부지, 갈게요."
"그려... 잘 가거라"
아기를 안고 기차에 올라 순자는 창밖에서 손을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금례는 벌써부터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걱정도 많고 다시 또 고생하러 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일단 한번 더 부딪혀 보기로 했다.
'나 이순자야! 할 수 있어. 잘 이겨낼 거야.'
어릴 때부터 궂은일들을 한 탓에 굵어진 손마디 마디를 다시 그러쥐며 용기를 짜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