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아, 여름의 약속』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11화

by 파랑몽상

6월의 후카가와는 막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래는 얇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마지막 5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히구치 이치요의 얼굴이 어쩐지 미안해 보였다.

창밖으로는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져 있었고, 따뜻한 6월의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름다운 계절에 돈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래는 교무실 문을 두드리기를 몇 번이나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심호흡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스레 교무실 문을 밀었다. 가벼운 한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홋카이도로 유학을 오기 전, 부모님과 단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한국 대학을 자퇴하고 홋카이도 단기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비행기 표와 3개월 치 생활비만 지원받을 것.

둘째, 유학 기간 동안은 어떤 이유로도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

나래의 유학을 반대하던 부모님은 그녀가 이런 조건이면 유학을 포기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래는 겁도 없이 승낙하고 홀연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조금씩 무너졌다. 3개월이 지나고, 지갑에 남은 건 겨우 5천 엔.

전기세가 아까워 빨래도 손으로 하고 식비도 아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이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나래는 공중전화 앞으로 달려갔다.

손에 꼭 쥔 동전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저렸다. 떨리는 손으로 한국의 국제 번호인 82를 눌렀다. 익숙하게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길고 긴 신호음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아빠."

나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 막내딸! 나래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했어. 잘 지내는지 걱정했잖아. 밥은 잘 먹고 있어? 잘 지내고 있지?"

나래의 아빠는 오랜만에 듣는 막내딸의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공중전화기는 그런 부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하게 동전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감동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본론부터 말해야 했다.

"아빠… 나, 돈 아끼려고 빨래도 손으로 하고, 청소도 빗자루로 했는데… 그런데도 돈이 없어…"

"아이고... 우리 막내딸, 고생했구나. 왜 울고 그래…"

잠시 숨을 고른 아빠가 조심스레 물었다.

"생활비가 필요한 거야? 얼마나 필요한데?"

나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 여기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중앙 병원이라는 곳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는 구했거든. 첫 월급은 다음 달에 들어오는데, 이번 달은 정말 못 버틸 것 같아. 다시는 안 부탁할게. 딱… 딱 5만 엔만 보내줘…"

그 순간,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어? 어…?"

나래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졌지만 더는 남은 동전이 없었다.

싸늘한 정적이 공중전화 부스를 가득 채웠다. 나래는 무기력하게 손을 늘어뜨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공중전화에서 아빠와 통화하는 나래)

나래의 부모님은 전라도의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었다. 나래가 태어나기 전에는 누에고치를 키우셨고, 철 따라 마늘 농사, 오이 농사를 지으시고, 겨울이면 시금치, 생강 등을 까서 내다 파시는 일을 하셨다.

배움에 한이 많으신 나래의 아버지는 5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셨고, 나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일본 유학까지 보내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래는 부모님께 유학생활을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아직은 일본어가 완벽하지 못해서 아르바이트 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미룰 수가 없었다.

나래의 마음을 모르는 듯 밤하늘의 별은 손에 잡힐 듯 자신의 빛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날 다시 교무과를 향했다.

"나래야! 무슨 일이야?"

나오키 씨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늘 멋지게 다듬어진 콧수염과 입꼬리가 볼에 달라붙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나래를 맞아 주었다.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나오키 씨, 부탁이 있어요. 저, 꼭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해서요."

나오키 씨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그녀를 벤치로 안내했다.

"오, 아르바이트? 구할 수 있지. 우리 학교로 아르바이트 의뢰가 꽤 많이 와. 좋아! 학교 게시판에 구인 공고 많이 올라와 있으니까 한번 보러 갈까? 나래한테 적합한 일이 있을까? 한 달에 얼마 정도 필요한 거야? 집세는 한국어 교실 하는 걸로 충당되는 거 아니었어?"

나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한 달에… 10만 엔 정도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야 생활비 하고 교재도 사고 혹시 모를 여행이나 쇼핑 등등 대비해서요. 중앙 병원 한국어 교실에서 2만 엔 정도는 벌고 있어서, 집세는 해결할 수 있거든요."

나오키 씨는 게시판을 가리켰다.

"수영장 감시 아르바이트가 있는데, 어때? 주말 근무고 시급은 750엔이야."

나래는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할게요. 면접 볼게요."

나오키 과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영장에 전화를 했고 면접 시간까지 잡아 주었다.

지금까지 고민만 했던 자신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래는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잘할 수 있을까?'

나래는 면접 볼 걱정에 수업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온수 풀장은 습기로 가득해서 마치 아열대 숲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새롭게 후카가와시에 만들어진 온수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락스 냄새와 익숙한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처음 보는 면접장은 낯설고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타쿠쇼쿠 단기대학 유학생이라고요?"

면접관의 질문에 나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한국에서 왔어요…"

"오! 일본어 정말 잘하시네요."

"아니에요. 아직도 배우는 중이에요. 근데… 저, 수영을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면접관은 웃으며 말했다.

"수영장 감시는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이 뛰거나 다이빙하는지 감시하는 거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혹시 다음 주부터 바로 근무할 수 있어요?"

"진짜요? 저 다음 주부터 바로 할 수 있어요. 수영은 못해도 감시는 잘할 수 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래는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그녀의 두 번째 아르바이트가 결정됐다.

수영장은 집에서 자전거로 15분 거리였다. 면접관은 나래를 데리고 수영장 내부를 안내했다.

"저기 보이는 분들, 대부분이 주부들입니다. 다들 수영은 잘 못하지만 제자리에 서서 15분마다 각 정해진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라서 쉬운 일이라고는 못하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일 하기 힘들어하더라고요. 1시간에 한 번씩 15분 휴식이 있습니다."

따뜻한 물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수영장의 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어깨 위로 스치는 익숙한 목소리.

"나래?"

뒤돌아보니— 소에다였다.

수영복에 젖은 머리를 한 소에다가 나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래의 심장은 자동 재생된 것처럼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파랑몽상입니다.

저번 주와 이번 주는 저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한 주였습니다.

첫 번째는, 1년 8개월 동안 일했던 치과를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치과 아르바이트는 저희 형님이 대표원장으로 계신 병원이라 시작하게 되었는데, 역시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연봉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결국 급하게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제가 원래 앓고 있던 목디스크가 엄청 심해져서 도저히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너무 아파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2주 동안 어디에도 글을 올리지 못했어요… 사람은 역시 건강이 최고라는 걸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화를 쓰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과거의 제가 현재의 저를 위로해 주는 것 같달까요?

후카가와시에 있는 '아에르'라는 온수 풀장에서 저는 유학 기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곳에서 같이 일했던 아주머니들이 다섯 분 정도 계셨는데, 그분들의 자녀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한국어 교실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 나름 홋카이도에 한류가 오기 전에 한류를 시작한 선구자가 아닐까요? ㅎㅎ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경험이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네요. 독자 여러분들도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값진 경험이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음 화에서는 드디어 소에다와 나래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파랑몽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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