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12화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영장 특유의 염소 냄새 사이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에다는 수영복 차림이었다.
“소에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당황한 나머지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수영모를 벗으며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고개를 살짝 흔들어 머리를 정리하더니,
소에다는 나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 나야 점심시간에 잠깐 수영하러 왔지.
나래야말로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저요? 아… 아르바이트 면접 보고 시설물 설명 듣고 있었거든요.”
나래는 눈앞의 반나체 소에다를 보며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멀리 보이는 슬라이드에 괜히 눈길을 두었다.
“아르바이트? 수영장 아르바이트 할 거야? 그럼 면접은 다 끝났어?”
“네. 거의 다 끝났어요.”
소에다는 긴 타월을 목에 둘렀다.
“잘됐다. 나도 지금 끝났거든. 씻고 나갈 건데, 잠깐만 기다려줄래?”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서 소에다를 만날 줄이야.
하기야, 소에다는 의사가 되기 전 수영 국가대표 상비군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영장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던 나래는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한 소에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소에다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며 손을 흔들었다.
“집에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자전거를 타고 오지 말걸요…
오늘 자전거 타고 왔거든요.”
소에다는 나래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며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가씨! 제 차에 자전거 싣을 수 있거든요.
그럼 같이 갈까요?”
나래는 뜻밖의 그의 행동에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항상 신사답고 어른스러웠던 소에다.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망설임 없이 자전거를 번쩍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에
나래는 순간 멍해졌다.
소에다는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따뜻한 공기로 가득한 차 안.
소에다 특유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나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자신을
소에다에게 들킨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런 나래의 마음도 모른 채,
홋카이도의 초여름 바람은 싱그럽기만 했다.
바람 속엔 초록의 향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아마 초록이라는 색을 향기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람의 향기라 말하면 가장 잘 맞지 않을까,
나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와! 날씨 진짜 좋다!”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소에다는 천진난만하게 바람을 느끼는 나래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래, 혹시 시간 되면 우리 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갈래?”
소에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래는 잠시 놀랐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진짜요? 오후 진료 없으세요?
저야 오늘 수업이 다 끝났지만 선생님은 아직이잖아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의 공간.
소에다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오후에 조금 늦게 예약이 있어서 괜찮아.
커피 한 잔 정도 할 시간은 있어.”
나래의 집은 센트럴 하우스 제2,
소에다의 집은 센트럴 하우스 제4였다.
제2 센트럴 하우스는 독신자를 위한 집.
제4는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나래는 알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며 소에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자가 이 집에 오는 건 처음이라서…
혹시 지저분해도 이해해 줘.
요즘 바빠서 청소할 시간이 없었거든.”
11살 많은 남자가 이렇게 귀엽게 변명하는 모습.
나래의 눈에는 참 사랑스러웠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완전 독신남 냄새가… 윽~~~”
나래는 일부러 코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며
집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소에다의 집은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깔끔한 공간.
소파 위에 덩그러니 놓인 파자마 하나를 빼면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어지러운 물건도 없었다.
“그런가? 하하, 나를 이렇게 놀린 건 나래가 처음인데?
나 나름 깔끔한 남자인데…”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소에다는 주섬주섬 정리를 시작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깜짝 놀랄 정도로 깔끔한데요?
이 오크 향 비슷한 냄새는 뭐예요?
선생님 몸에서 나는 향기랑 비슷한 것 같은데요?
남자가 이렇게 깔끔하면 좀 배신감 드는데요?”
나래가 살고 있는 기숙사보다 훨씬 넓은 공간.
벽면 한쪽엔 책이 빼곡했고,
거실 중앙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자리했다.
파란색의 4인용 소파는
앉기만 해도 온몸이 푹 파묻힐 것 같은 포근함을 풍겼다.
소에다는 나래를 소파로 불러 앉혔다.
“나래, 여기 와서 앉아.
커피 바로 내려줄게.”
그가 드립 커피를 내리는 동안
은은한 커피 향이 집 안을 채웠다.
소에다는 자연스럽게 나래 옆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5년 전에 북한에 다녀온 적 있다고 했지?
그때 찍어온 영상이 있는데, 볼래?”
“네? 북한이요?
거기서도 영상을 찍을 수 있었어요?
꼭 보고 싶어요!”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했다.
소에다는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재생기에 넣었다.
스르륵 돌아가는 테이프 소리.
낡은 필름이 재생되는 듯한 아련한 감정이 퍼졌다.
화면 속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회색빛 건물들, 무표정한 사람들,
그리고 군인들의 늠름한 걸음.
김일성 동상은
TV에서만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게… 진짜 북한이구나.”
나래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영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북한은 한국과는 전혀 달라.
사실 나도 한국엔 한 번밖에 못 가봤는데,
너무 발전해서 깜짝 놀랐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소에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상 속 풍경과 그의 목소리가 겹치며
시간이 멈춘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나래는 슬며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높고 곧은 콧날, 부드러운 입술 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 때
링거를 놓아주던 따스한 손길이 떠올랐다.
그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선생님, 저는 뉴스 말고
이렇게 직접 찍은 북한 영상은 처음 봐요.
훨씬 생생하네요.”
“그렇지.
실제로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나래는 소파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커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는 그녀를
소에다는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그의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그 시선을
나래도 이미 다 느끼고 있었다.
그의 숨결, 손끝의 움직임.
모두가 나래에게 긴장감을 주었다.
“북한 여자들이 그렇게 예쁘다던데요?”
어색한 공기를 깨고 싶어
나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소에다의 입가엔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예쁘다기보단…
식당 여종업원들은 너무 긴장해서
표정이 거의 없었어.
나래처럼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이 훨씬 예쁘지.”
소에다는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줄기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는 커피의 감촉이 남았다.
“선생님, 너무 눈이 낮으신 거 아니에요?
저는 정말 평범한데요?
어떤 때는 못생겨서 불만일 때도 있다니까요? 하하.”
나래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소에다는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깊어진 시선에
나래의 가슴이 덜컥했다.
“내가 말하는 건, 미소야.
나래의 따뜻하고,
사람들 마음속까지 밝혀주는 미소.
이렇게 순수한 미소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나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거실엔 은은한 커피 향기,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가득했다.
심장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창밖으로는 초여름 바람이 살랑거렸다.
곧 나래는 홋카이도의 첫여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처음’이라는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을 조용히 설레게 했다.
작가의 말
홋카이도 유학 시절, 실제로 수영장에서 감시원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저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죠.
하지만 실내가 얼마나 더웠는지…
시간이 너무나 안 가서, 매일매일이 참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소에다 쇼이치는 정말 수영을 잘했어요.
지금도 그분이 버터플라이를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