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와 빈첸조를 만나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7화

by 파랑몽상

홋카이도의 여름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나래 앞에 나타난 두 소년.

안드레아의 사촌 비토와 빈첸조, 그리고 루모이 바다로의 초대.

새로운 인연과 설렘이 시작되는 순간, 나래의 여름은 한층 더 특별해진다.


이자카야의 밤, 지친 하루 끝

밤 11시, 이자카야의 마지막 손님이 문을 나서자 나래는 깊은 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도 끝났구나."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로커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머리카락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온몸에는 튀김과 꼬치구이의 진한 간장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여름철이라 농사일을 끝내고 한 잔 하러 오는 손님들로 가게는 매일 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나래는 가게 앞에 세워둔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페달을 밟으려니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누가 집까지 대신 태워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온몸이 녹초였지만, 그럼에도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며칠 전 브런치 카페에서 소에다 선생님이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전해진 따뜻함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듯해서, 나래는 무심결에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카페에서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연애를 막 시작한 사람만이 느끼는 설렘일까.

센트럴 하우스 4동 앞을 지나며 나래는 소에다의 방 창문을 올려다봤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도 병원에 계시는 건가?'

그녀는 살짝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다시 페달을 밟았다.

한밤중의 시원한 여름 공기가 뺨을 스치고, 인적 없는 후카가와의 거리에는 나래의 콧노래가 조그맣게 퍼져나갔다.

피곤한 몸과는 달리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복도에서 만난 새로운 얼굴들

아파트 복도에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자, 예상대로 안드레아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나래~ 오늘도 수고했어!"

안드레아는 반갑다는 듯 나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두 명의 소년이 조심스레 서 있었다.

" 기억나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우리 사촌들이 홋카이도에 한 달 살기 하러 온다고.

오늘 드디어 도착했어, 소개해주고 싶어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지!"

나래는 며칠 전 안드레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사촌 동생들이 일본에 온다고 했었지.'

안드레아는 뒤에 있는 두 소년을 가리켰다.

"먼저, 수염을 멋지게 기른 애가 비토야. 열아홉 살, 그리고 귀여운 곱슬머리를 한 애는 빈첸조, 열일곱 살이야."

나래는 순간 살짝 놀랐지만 곧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이나래예요. 스물한 살이에요."

비토가 먼저 나래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Hi! 난 비토야. 안드레아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짧게 다듬은 수염, 얼굴 한가운데 뚜렷하게 자리 잡은 코,

그리고 환하게 번지는 미소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빈첸조는 수줍은 듯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Hi! 나는 빈첸조. 만나서 반가워."

곱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 양 볼에 패인 옅은 보조개가 어딘가 어린 티를 남기고 있었다.

긴장한 듯 머뭇대는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여워 보였다.

둘 다 나래보다 키가 조금 크거나 비슷한 정도의 아담한 체격이었다.

나래는 속으로 '외국인도 이렇게 아담할 수 있구나…' 하고 슬며시 놀랐다.

" 우리 집이 좀 지저분하지만 괜찮으면 들어가서 얘기할까?"

나래의 제안에 안드레아와 두 사촌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37화 이미지.png

노란 방, 첫인상의 따뜻함

잠시 후 나래의 집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함께 들어섰다.

비토는 방 안 가득한 밝은 색을 보고 감탄했다.

"와! 온통 노란색이네? 나래는 노란색 좋아해?"

"응. 노란색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밝아지거든."

나래가 웃으며 대답했다. 빈첸조는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더니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그런지 방 분위기가 정말 아늑하네요."

나래는 쑥스럽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네 개의 잔에 따르고 코타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일행은 마룻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각자 잔을 들었다.

이렇게 외국 친구들과 방바닥에 둘러앉아 주스를 마시며 이야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래에게는 새롭고도 조금 어색한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순간이기도 했다.


루모이 바비큐 파티의 초대

모두가 한 모금씩 주스를 마셨을 때, 안드레아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는 제안을 할 때 늘 그렇듯 장난기 어린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래, 사실 우리 너한테 제안할 게 하나 있어."

"뭔데?"

나래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안드레아가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주말에 루모이 해변에서 1박 2일로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Keith가 그러는데 외국인 친구들끼리 매년 여름마다 하는 작은 전통 같은 행사거래.

정말 재미있다고 하더라고, 너도 같이 갈래? 소에다 선생님도 함께 오시면 더 좋고!"

"루모이…?"

나래는 순간 낯선 지명에 머릿속을 더듬었다.

후카가와역 플랫폼 한쪽에 붙어 있던 '루모이행' 안내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낯설지만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 이름이었다.

"언제 가는데?"

"이번 주말이야. 토요일 아침에 출발해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와. 알바 하루쯤 빼도 괜찮지?"

나래는 솔깃했지만 잠깐 망설였다.

소에다 선생님도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먼저 여쭤보고 알려줄게."

"소에다가 혹시 같이 못 가도, 너는 꼭 와줘! 우리 사촌들도 네가 같이 가면 훨씬 편해할 거야."

안드레아는 장난스럽게 나래의 팔을 흔들며 거듭 부탁했다.

나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비토의 시선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일본어 교재로 향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교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오— 너 일본어 공부해?"

"응, 나 대학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있어."

"정말 멋지다!"

비토가 감탄했다.

"나도 일본 만화랑 애니메이션 좋아해서 일본어 조금 알거든. 우리 나중에 기회 되면 언어 교환도 하자!"

빈첸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용기를 낸 듯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특히 음식이랑 전통 건축물 같은 거. 나중에 루모이에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눌 수 있겠다."

나래는 문득, 이 세 사람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묘하게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도, 자란 나라도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그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과 함께라면 루모이 여행도 분명 유쾌하고 즐거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37 이미지.png

새벽의 여운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를 훌쩍 넘었다.

하나둘씩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나래는 자신이 영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어느 중간쯤의 세계에 서 있는 듯한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낯설고도 포근한 세계 속에서, 또 하나의 여름 인연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비토와 빈첸조는 8월 한 달 동안 안드레아의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한 달 뒤, 후카가와 역에서 작별할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던 모습이 아직도 제 마음속에 선명합니다.

그 후 비토는 1년 뒤 다시 후카가와에 찾아와 두 달을 더 머물다 캐나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오사카에서 일본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인생이란… 정말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강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에, 그 순간순간이 더욱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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