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6화
Keith가 추천한 신비로운 카페를 향해 세 사람이 떠난다. 홋카이도의 여름, 예상치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Keith의 지프가 시내를 벗어나자 세상이 달라졌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대신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나래는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홋카이도의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풀내음과 나무 향이 섞인 공기였다.
앞 좌석에서 안드레아가 Keith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손이 기어봉에서 떨어져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나래는 순간 부러움을 느꼈다.
'저런 자연스러움, 나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리고 불쑥 떠오른 건, 술에 취하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던 준철 오빠였다.
나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프는 좁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양쪽으로 자작나무들이 완벽한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하얀 껍질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래는 자작나무를 좋아했다. 완벽하지 않은 그 모습에, 여기저기 벗겨진 껍질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마치 시간이 새겨놓은 흔적 같았다.
나무 아래로는 진한 풀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자란 풀들은 햇살 속의 풀들보다 더 진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들꽃들 사이를 넘나드는 꿀벌들이 자신들만의 신호를 보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는 정말 조용하네.”
나래가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 하얀 자작나무들이 둘러싼 작은 오두막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케이코의 브런치 가게'라는 소박한 손글씨 간판이 걸려 있었다.
"오하요! 오겐키데스카?"
긴 머리를 뒤로 묶은 30대 초반의 여성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인사했다.
따뜻한 미소 속에서 일본인 특유의 살짝 삐뚤어진 덧니가 눈에 띄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보라색과 핑크색의 라벤더 꽃이 프랑스 자수로 정갈하게 수 놓인 넨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케이코, 우리 왔어요. 이쪽은 한국에서 온 나래, 그리고 내 여자친구 안드레아야!"
Keith가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두 여자를 소개하자 케이코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케이코는 메뉴판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오늘은 홋카이도산 단호박으로 만든 크림 수프, 명란젓 파스타, 홋카이도 연어를 곁들인 크림 파스타가 있어요. 그리고 이곳의 자랑인 홋카이도산 우유로 만든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자 테이블 위에 들꽃 한 송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자작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사각사각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들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나래는 이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꼈다.
자작나무 숲 속의 작은 카페, 이국적인 친구들, 그리고 홋카이도의 맑은 공기.
하늘의 빛깔을 가릴 만큼 높게 솟은 나무들.
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혀 내는 소리에 나래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소에다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반짝였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나래는 자리를 벗어나 길가에 피어 있는 노란색 들꽃에 살며시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나래, 잘 잤어?"
소에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
"네, 선생님은요?"
"잘 잤어. 나래 지금 뭐 하고 있어?"
나래가 답하려던 순간, 안드레아가 나래의 통화를 눈치채고 큰 소리로 외쳤다.
"Hey, Soeda! Come here! We're at Keiko's cafe!"
나래는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소에다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래? 나도 몇 번 가본 적 있어서 알고 있어. 준비하고 바로 갈게."
30분 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소에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에 여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나래는 소에다를 보자 벌떡 일어나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 Keith와 인사를 나눴다.
케이코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네 분은 어떤 사이세요? 국적이 다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나셨어요?"
안드레아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우리 커플이에요. 소에다와 나래, 저와 Keith가 커플!"
나래는 커피를 삼키다 기침을 했다. 소에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케이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 소에다 선생님 여자친구분이셨구나. 저는 소에다 선생님은 여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케이코의 말에 나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미나코라고 아세요? 미나코가 우리 가게에 자주 오거든요. 미나코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아시는 것 같은데 미나코에 관심이 없어서 혹시 여자 싫어하시나 했거든요."
소에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미나코 씨에게는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고는 나래를 바라보았다.
일본인치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순간, 나래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케이코가 자리를 비우자,
소에다와 나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나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순간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래를 한참 응시하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나래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가슴까지 퍼졌다. 나래는 자신의 다른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자작나무 숲 속에서 네 사람 사이의 공기는 느리게 그리고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흘러갔다.
후쿠가와는 홋카이도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3년 전에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색이 바래버린 듯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노인 인구만 남고 젊은 사람들은 떠난 도시.
조만간 제가 다니던 대학마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오늘 소설에 등장한 케이코의 식당은 실제로 있던 곳입니다.
작지만 정갈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죠.
더 놀라운 건, 이곳의 주인 케이코가 훗날 Keith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말이죠.
인연이라는 건 참 신비합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