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모이 해변, 그 여름의 끝자락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8화

by 파랑몽상

홋카이도 후카가와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나래가 루모이 해변에서 보낸 잊지 못할 여름날. 짙은 초록빛과 차가운 바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울림을 담은 이야기.



기차를 타고 루모이로

후카가와를 출발해 루모이로 향하는 5량짜리 기차는 장난감처럼 아담했다.

나래와 비토, 빈첸조는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짙은 초록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름이지만 에어컨을 켜지 않은 기차 안으로 싱그러운 바람이 부드럽게 흘러 들어왔다.

"나래, 저 산 너머엔 뭐가 있을까?"

비토가 창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아마 더 깊은 숲이겠지?"

나래가 대답하자, 빈첸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린 모험가가 된 기분이야! 이 기차 안에 우리밖에 없어"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기차 안에 맑게 울려 퍼졌다.

처음엔 서먹했던 사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래는 비토, 빈첸조와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나래는 그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따뜻했다.

창문 너머로 스치는 여름 하늘은 너무 파랗게 빛나 눈이 부셨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초록빛이 가득했다. 나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순간이 그대로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루모이 역

루모이 역에 도착하자, 나래는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낡은 역사, 느린 사람들, 쇠락한 항구 마을의 정취. 1940년대 어느 여름날에 덜컥 떨어진 것 같았다.

안드레아와 Keith가 열차 시간에 맞춰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여름 햇살이 아스팔트를 달구면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피부에 닿자마자 소금기를 남겼다.

해변에 도착하자, 나래 일행을 맞이한 것은 뜨겁게 달궈진 검은 모래사장이었다.
한국의 해변과 달리, 이곳의 모래는 검은빛을 띠고 있었고 입자가 거칠어 발끝에 낯선 감촉을 남겼다.
발가락 사이로 서걱서걱 스며드는 소리가 여름 햇살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닷가에서는 따끈하면서도 습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 끝자락의 숨결처럼 스며들었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여름 파티

검은빛을 띠는 모래 해변 위로, 스무 명쯤 되는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수영복을 입고 자유롭게 해변을 즐기는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나래는 안드레아가 챙겨 온 파라솔과 의자를 펼치고, 비토, 빈첸조와 함께 시원한 음료수를 홀짝였다.

발끝으로 모래를 슬쩍 건드릴뿐,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글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안드레아가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며 웃었다.
"나래! 내 수영복 어때?"

"정말 섹시한걸!"

나래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외쳤다.

안드레아는 깔깔 웃으며 엉덩이춤을 추더니 이내 바다로 뛰어들었다.

비토와 빈첸조는 모래찜질을 하며 인어 모양, 근육질 조각상을 만들면서 어린아이처럼 웃어댔다.

나래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안드레아와 Keith는 병맥주를 손에 든 채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애정 표현을 나눴다. 그

러다 가끔 나래를 향해 장난스럽게 손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나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외국인들은 참… 자유롭다.”

파란 눈동자, 노란 머리카락, 밝은 갈색과 붉은색 머리카락들이 해변을 가득 채웠다.

비치발리볼을 하고, 태닝을 즐기며, 음악이 흐르면 망설임 없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분홍빛으로,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나래는 휴대폰을 꺼내 노을 사진을 찍었다.

검은 모래사장과 대조되는 붉은 하늘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그 순간 문득 소에다가 떠올랐다.

'그도 이 노을을 보고 있을까?'

나래는 노을 사진을 찍어 그에게 보냈다.

'루모이 해변의 노을이에요. 예쁘죠?'

답장은 금세 왔다.

'아름답다, 나래야! 우리도 다음에 같이 바닷가에 가서 이런 노을 보자.'

나래의 얼굴이 노을빛에 붉게 물들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밤바람에는 차가운 기운이 숨어 있었다. 나래는 비치 타월을 걸치고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 파도 소리를 들었다.

바다는 어둠 속으로 삼켜지고 있었고, 여름도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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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모닥불과 컬처 쇼크

여름밤이 깊어지자 해변에는 커다란 캠프파이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고, 사람들이 환호했다.

술에 취해 모래 위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 각자 무리를 지어서 대화를 하는 사람 들도 있었다.

안드레아도 적당히 취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슬쩍 웃더니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하나둘 옷을 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안드레아도 있었다.

다들 누드였다.
나래는 순간 컬처 쇼크를 받았다. 붉은 노을 아랫사람들의 뒷모습과 기다란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바닷속으로 사라져 갔다.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나래는 비토, 빈첸조와 함께 모닥불 곁에 앉아 뜨거워진 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열기가 식어가는 여름을 조용히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고 있었다.

검은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여름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나래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소에다였다.

'나래, 내일 루모이에서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을 수 있을까?'

나래는 별빛 아래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름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나래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계절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루모이 해변 파티에서 마주한 외국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한동안 제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그날 저녁, 비토와 빈첸조와 같은 방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만취한 캐나다 청년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거기 한국인! 나랑 같이 좋은 시간 보내는 게 어때?”

막무가내로 제 팔을 붙잡던 순간, 비토가 그의 손목을 비틀어 제지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소설 속 장면을 써 내려가다 보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피어오릅니다.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제 안의 오래된 계절들과 다시 마주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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