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9화
"나래!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북한에서 찍어온 영상 같이 볼까? 피자도 주문해 놓을게."
루모이 해변 파티를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간 줄도 모르고, 나래는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며 소에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열흘 만에 다시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래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오늘 저녁 한국어 교실 끝나고 선생님 집으로 갈게요.'
설렘과 기대감을 꾹 눌러 담아 답장을 보냈다.
소에다와 사귄 지 이제 3주 차.
학회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그였지만, 바쁜 와중에도 소소한 문자로 사랑을 표현해 왔다.
'나래, 보고 싶어.'
이 짧은 문장 하나로도 나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성당 레스토랑에서의 프러포즈를 떠올리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여자가 또 있을까.'
나래는 핸드폰을 가슴에 안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천정에 천천히 소에다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바쁜 하루 속 잠깐의 공백조차, 그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나래!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이 환하네."
한국어 교실에 일찍 도착한 미나코가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왔다.
민소매 파란 폴로 원피스에 하얀 샌들을 신은 미나코.
하얀 피부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산뜻한 차림이었다.
"미나코짱~ 오늘 진짜 예쁘다!"
나래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감 넘치는 미나코는, 직장에서의 위치만큼이나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예전에 미나코의 집에 갔을 때, 태그도 떼지 않은 수많은 명품 가방과 옷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미나코는 살짝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이혼하고 난 뒤엔 허전해서 명품만 사들였어. 지금은 사놓고도 택을 떼지 않은 게 수두룩해.
다 허전함이 만든 흔적이야. 나래, 너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이 나래의 가슴속 깊이 조용히 떨어졌다.
미나코가 소에다를 5년 전부터 좋아해 왔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소에다가 도쿄로 돌아가지 않길 바랐던 미나코의 고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 미나코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래는 소에다와 비밀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죄책감의 가시가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미나코, 오늘 약속이라도 있어? 너무나 예쁜데?"
나래가 조심스레 물었다.
미나코는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며 말했다.
"한국어 교실에 오면, 소에다 선생님이 계시니까... 신경 쓰여서."
순간, 나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커다란 비밀을 가슴에 묻고 있는 것 같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죄책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미나코, 다음에 시간 되면 나랑 밥 먹자! 괜찮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미나코는 찡긋 윙크하며 언제든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래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다음에는, 미나코에게 소에다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말하자.'
소에다의 집은 '제4센트럴 하우스'에 위치해 있었다.
나래의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한국어 교실이 끝나자마자, 나래는 조심스럽게 소에다의 집으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입술에 은은한 코랄빛 틴트를 한 번 더 발랐다.
문 앞에 서서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소에다는 거실에 있는 거울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은 나래가 서 있었다.
그의 눈에 나래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다.
"어서 와."
따뜻하게 웃으며 나래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손이 살짝 나래의 등을 감싸는 순간,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따끈한 살라미 피자와 투명한 와인잔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피자에서 올라오는 김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더욱 달콤하게 만들었다.
"배고프지? 피자 시켰는데 괜찮아? 나폴리탄도 같이 주문했어."
소에다는 조심스럽게 나래의 접시에 피자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아참!! 오늘은 북한에서 내가 찍어 온 영상 보기로 했지? 영상도 틀어놓자!"
오늘따라 소에다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평소의 차분하고 조용한 소에다와는 달랐다.
나래는 그런 소에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선생님, 천천히요! 왜 이렇게 허둥지둥거려요? 시간도 많은데!"
나래는 웃으며 소에다를 타박했다.
소에다는 머쓱하게 웃으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래는 그 작은 제스처에도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나래, 나 긴장했나 봐. 네가 내 여자친구가 돼서 우리 집에 오는 건 처음이잖아."
그 말에 나래는 피자 한 조각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여자친구란 말, 진짜 듣기 좋다. 선생님이 직접 불러주니까 감동인데요?"
그리고 덧붙였다.
"매일이 감동이에요. 성당 레스토랑에서 선생님이 연주해 준 그 곡, 지금은 제 인생곡이 됐어요. 무언가 더 해주려 애쓰지 않아도 돼요. 그냥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요. 전, 선생님만 있으면 되니까요."
나래의 스트레이트한 고백에 소에다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부드럽게 웃었다.
일본 여자들과는 다른, 솔직하고 따뜻한 나래의 표현이 오히려 더 좋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소에다는 피자 한 조각을 손에 들고 나래 옆으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살짝 닿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 근데 나도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소에다는 조심스럽게 나래의 손을 잡았다.
그의 길고 단정한 손이 나래의 투박한 손을 꼭 감싸자,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 지금 피자 먹는 중이잖아요! 기름 묻어요!!"
나래가 장난스럽게 외쳤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소에다는 눈가에 잔주름이 잡힐 만큼 환히 웃으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지금 이 순간, 나래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로 비쳤다.
"나래야, 이렇게 솔직하게 뭐든 다 말하는 네가 정말 좋아."
두 사람은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른 채, 따뜻한 대화를 이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별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작가의 말: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한낮에는 눈부신 햇살이 아직 여름처럼 따갑더군요.
이런 하늘, 이런 날씨를 1년에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요즘은 일부러라도 밖으로 산책을 나서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