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44화
구시로 트레킹을 마친 일행은 뉴아칸 호텔에 도착했다.
아칸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리조트형 온천 호텔이었다.
시설은 낡았지만 창밖의 풍경이 모든 아쉬움을 삼켜버렸다.
로비에 들어서자, 통유리 창 너머로 펼쳐진 아칸호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와 닿았다.
나래는 홋카이도에 와서 처음으로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이번 여행에서 안드레아, 나래, 케이코, 나카무라 씨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연애 이야기가 피어오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나카무라 씨가 침대에 앉아 물었다.
“나짱, 진짜 연애를 시작한 거야? 아르바이트 하느라 바빴을텐데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대?”
“연애할 시간은… 있었죠, 뭐.”
나래는 웃으며 말을 흐렸다.
창밖에는 저녁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케이코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어떤 사람이야?”
안드레아가 두 손을 들며 영어로 외쳤다.
“Wait. All I know is… Na-rae kissed him.”
“꺄악! 방금 키스라는 단어 들었지? 언제? 어디서?”
방 안은 금세 술렁였다.
나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음… 그게… 수요일에 한국어 교실이 끝나고, 피자 먹다가… 그냥, 가볍게,자연스럽게...”
순간, 방 안에 웃음과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 소리는 호텔 복도까지 울려 퍼질 듯했다.
밤이 되자 모두 호텔 9층 대욕장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 너머로 아칸호 위에 달빛이 퍼지고, 별빛은 호수 위로 흩어졌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순간,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때 케이코가 불쑥 말했다.
“여러분~ 나짱이 연애한대요~.”
“에에에에~?!”
순식간에 시선이 나래에게 쏠렸다.
수증기만으로도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 위로 쏟아지는 시선까지 더해지자 얼굴은
금세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나래는 욕탕 속으로 몸을 더 숨기고 싶었다.
“얘기해줘. 여기까지 왔는데 궁금해서 못 참겠어.”
나카무라 씨가 손을 꼭 쥐며 재촉했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은… 중앙 병원에서 안과 의사로 일하시는 소에다 선생님이에요.”
“의사? 진짜?”
“우와아아!”
짧은 대답 하나에 환호가 대욕장을 가득 채웠다.
“중앙 병원 안과 의사라면, 키 크고 외국 사람처럼 생긴 분 아니야?
나 그 선생님 알아. 병원에서 인기가 많던데.”
가네다 씨가 놀란 눈빛으로 나래를 바라봤다.
나래는 맞다는 표시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야마구치 씨가 웃으며 말했다.
“나짱! 오늘은 잠 잘 생각하지 마. 우리가 나짱 연애담 실컷 들어줄 거니까.”
순간, 욕탕 안은 다시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날 밤, 아칸호와 별빛보다 더 반짝이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저녁 식사 자리, 레스토랑은 투숙객들로 붐볐다.
우리가 예약한 테이블 위에는 이미 생맥주 아홉 잔이 놓여 있었다.
“우리의 첫 여행을 축하하고, 나짱의 연애와 첫 키스를 기념하며! 건배!”
잔들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삼키자, 목을 간질이는 거품과 함께 낯선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나짱,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빨개지면 어떻게 해?”
야마구치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 한잔에 취하잖아요. 갑자기 알코올이 온몸에 쫙 퍼지는 느낌이에요… 와!”
나래는 비틀거리며 취한 사람 흉내를 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결국 나래는 한 잔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 대신 우롱차를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보다 따뜻한 마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야마구치 씨가 잔잔히 말했다.
“나짱,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 홋카이도의 후카가와라는 작은 도시로 유학 와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내 딸은 아니지만 정말 대견스러워. 우리는 나짱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니까,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줘. 딸처럼 생각하고 응원할게.”
그 말에 나래의 가슴이 울컥했다. 눈가가 서서히 젖어 들더니, 참았던 눈물이 끝내 솟아올라 뚝뚝 떨어졌다.
머나먼 이국에서 가족처럼 자신을 품어주는 이들.
그 순간, 그 공간은 가족보다 더 따뜻했다.
“나짱! 술 한잔에 이렇게 감정이 풍부해진 거야?”
단 씨의 농담에 모두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연애 진심으로 축하해! 결혼까지 가자!”
케이코가 또다시 건배를 외쳤다.
웃음과 눈물, 건배와 위로.
그 밤, 아칸호의 어둠 속에서도 별빛은 여전히 반짝였다.
작가의 말:
서른에서 마흔이 될 때까지는 나이 든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쉰이 불과 2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내가 정말 ‘중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50세가 되기 전에 작가가 되는 것이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 사실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