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43화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바람이 먼저 맞아주었다.
여름인데도 선선했다.
습지라 눅눅할 줄 알았는데, 구시로의 바람은 오히려 건조하고 산뜻했다. 풀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몸을 스쳤다. 저 멀리 갈대밭이 바람에 일렁이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일본 최대의 습지래. 근데 전혀 눅눅하지 않지?”
안드레아가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여기는 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20도 안 넘는대. 트레킹하기 딱 좋아.”
“안드레아! 여기 오기 전에 구시로에 대해서 공부 좀 했구나.”
나래는 작은 배낭을 꺼내며 웃으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밴에서 내리고 있었다. 대부분 양손에 등산 스틱을 들고 있었다.
“습지길 걷는 건데, 스틱까지 필요해요? 거의 평지 같던데요?”
나래가 단씨에게 물었다.
“나짱, 나도 너 나이 땐 이런 거 들고 다니는 아줌마들 이해 못 했어.”
단씨가 스틱을 땅에 콕 찍으며 웃었다.
“근데 50 넘으면 알게 돼. 연골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무릎은 한번 나빠지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
“나짱 것도 준비해왔어. 안드레아 것도. 스틱이 있는 게 훨씬 편할 거야.”
단씨가 건네준 스틱을 손에 쥐자 묵직한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기로 잠깐 모여주세요!”
오늘 가이드를 맡은 나카무라씨가 손을 들어 모두를 불렀다.
“오늘 코스는 구시로 습원 전망대에서 출발해 온네나이 방문자 센터까지 다녀오는 왕복 코스입니다. 편도 약 5킬로미터, 왕복 10킬로미터 정도 되고, 길은 데크로드라서 누구나 걷기 좋아요. 왕복 5~6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박수로 화답했다.
나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내가 홋카이도까지 와서, 친구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라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야마구치씨의 외침과 함께 트레킹이 시작됐다.
습지 위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 나무 데크가 펼쳐졌다. 처음 10분 정도는 모두 말이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 물결.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갈대와 풀들. 그 위로 구름 그림자가 천천히 이동했다.
“나짱, 저기 봐.”
가네다씨가 하늘을 가리켰다.
멀리서 커다란 새 두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붉은 점이 박힌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혹시… 탄쵸?”
나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코씨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일본두루미, 구시로의 상징이지. 여름에는 번식하느라 습지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보기 힘든데, 오늘은 운이 좋은 거야.”
나래는 숨을 멈춘 듯 그 새들을 바라보았다. 두루미의 느린 날갯짓이 초록빛 바다 위를 천천히 가르며 지나갔다. 잠깐이었지만 오래 기억될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식물도감을 펼쳐 이름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카메라로 풍경을 담았다.
“나짱, 새소리 들려?”
케이코씨가 물었다.
나래는 귀를 기울였다. 꾀꼬리, 뻐꾸기, 이름 모를 지저귐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와 갈대 소리가 섞여 하나의 교향곡처럼 들렸다.
데크 양옆에는 사초, 조릿대, 그리고 둥근 언덕 모양의 ‘야치보우즈’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식물 하나조차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나래는 그 끈질김에 묘한 존경심을 느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저기 보여요! 온네나이 방문자 센터예요!”
나카무라씨가 앞을 가리켰다.
저 멀리 작은 건물이 보였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다리는 무거웠지만 기분은 가벼웠다.
센터에 도착하자 모두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 죽겠다.” 안드레아가 신발을 벗으며 웃었다.
“근데 진짜 기분 좋다.”
“응, 이렇게 걸어본 건 진짜 오랜만이야.”
센터 안에는 구시로 습지의 역사와 생태계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빙하기 이후 형성된 습지, 600종이 넘는 식물, 멸종 위기의 새들.
나래는 패널 앞에 서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은 더 편안했다.
같은 길인데도 풍경은 달라 보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습지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바람도 아침보다 선선해졌다.
나래는 순간, 소에다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상상을 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데크 위를 걸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번졌다.
“나래! 무슨 생각하느라 불러도 대답이 없어?”
안드레아가 물었다.
“어? 그냥… 좋아. 그냥 웃음이 막 나네.”
나래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안드레아도 따라 웃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은 방문자 센터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가방에서 꺼낸 시원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바람은 여전히 산뜻했고, 습지는 황금빛 저녁 속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소설을 쓰다 보면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계속 이어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제 멈추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 수없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그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써온 이 소설만큼은 꼭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매일 글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