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로의 가는 길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42화

by 파랑몽상

여름의 시원한 바람, 아줌마들의 수다, 그리고 첫사랑의 하트.

구시로 습원 앞에 선 순간, 나래의 심장이 가장 크게 뛰었다.


구시로로 출발

9인승 밴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차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일본 여자는 정숙하다'는 편견은 아줌마들 앞에서 무너졌다.
쌀농사 이야기, 멜론 시세, 예쁜 꽃 정보까지—정보 교환의 장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단 루미코 씨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나짱, 남자 거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 없지? 남자는 아이나 어른이나 모양은 똑같아. 크기만 다르지. 괜히 궁금해하지 마."

이런 농담을 태연히 해내는 그녀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단 씨의 인생 상담소

"나짱, 젊을 때는 연애도 많이 해봐야 해."

단 씨가 갑자기 나래를 보며 말을 던졌다.

"남자라는 건 말이야, 아이든 어른이든 본질은 똑같아. 다만 나이 들수록 포장만 교묘해질 뿐이지."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래는 얼굴이 빨개져 창밖만 바라봤다.

"단 씨, 나래 당황하잖아요."

케이코 씨가 말렸다.

"뭘 당황해. 이런 건 미리 알아둬야 하는 거야. 나짱은 예쁘니까 나쁜 남자들이 접근할 수도 있어."

나래는 소에다를 떠올렸다.
당황스럽게도 그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이 먼저 떠오르면서, 짜릿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첫사랑의 설렘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래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래~ 친구들과 조심해서 다녀와. 보고 싶어' ♡

하트 하나가 더해진 짧은 문자.
꿈같았던 그와의 시간이 현실임을 확인시켜 주는 증표였다.

"나짱, 누구한테서 온 거야? 얼굴이 완전 빨개졌네."

안드레아가 옆에서 슬쩍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소에다… 의사 선생님이구나! 나래, 완전 사랑에 빠진 얼굴인데?"

"아니야!"

나래는 서둘러 휴대폰을 감췄다.

"오~ 나짱도 남자친구 생긴 거야?"

단 씨가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차 안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모두가 나래의 연애에 관심을 쏟았다.

나래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창에 이마를 기대고 흐릿한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그림자가 초원 위를 느릿하게 지나갔다.


간식 타임과 농사 이야기

"자, 배고프지? 내가 주먹밥 만들어 왔어."

데라시타 씨가 도시락 뚜껑을 열자, 각자 싸 온 주먹밥과 간식들이 차 안에 펼쳐졌다.

"나짱도 먹어봐. 우리 논에서 직접 지은 쌀로 만든 거야."
"감사합니다!"

윤기 흐르는 쌀밥에 연어 소보로를 얹은 단순한 주먹밥.
그런데도 쌀만으로 충분히 맛의 잔치가 열렸다.
찰진 밥이 풍성한 맛을 만들어 낸다는 걸, 나래는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 내가 먹어본 주먹밥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 같아."
안드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이게 바로 홋카이도의 밥맛이야"

케이코 씨가 맞장구쳤다.

"올해도 쌀농사는 풍년이 될 거야.

가을걷이가 끝나면 나짱에게 선물 줄게."

가네다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농사의 신이 따뜻한 햇살을 오래 주길 기도해야지.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야. 결국 하늘이 짓는 거니까."

농사 이야기가 시작되자 모두가 진지해졌다.
날씨, 병충해, 시장 가격까지—이들에게 농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선 삶 자체였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45화 이미지.png

구시로 도착

"저기 봐! 구시로 습원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습지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후카가와에서 구시로까지 약 300킬로미터.
웃고 떠드는 사이 다섯 시간이 훌쩍 흘렀다.

차에서 내린 나래는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흐린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습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들이 하늘을 무겁게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래에게는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습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사이로, 새로운 여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여러분 중에 구시로를 여행해 보신 분이 계실까요?

제가 살던 200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홋카이도의 기온이 높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맨션에는 에어컨이 설치된 집이 한 군데도 없었지요.

그래서 그때 구시로에서 맞이했던 선선한 바람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홋카이도도 기온이 많이 올라, 작년 6월 말에 다시 찾았을 때는 더위가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은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어떤 날씨와 풍경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혹시 구시로에 다녀오신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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