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50
소에다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나래.
파혼과 임신이라는 무거운 고백 앞에서,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게 흔들린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싶었지만, 감정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마음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가 헤어졌다는 이야기까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상처가 클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파혼'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심지어 '임신'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나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완전히 길을 잃었다.
'술에 취해서 어지러운 건가...?'
'졸린 건가...?'
갑자기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제는 과거잖아. 선생님은 지금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라고 결혼을 반대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한국인에다가, 직장도 없는 유학생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마음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과거는 묻고 넘어가면 돼'라고 정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지다 보니, 마치 컴퓨터에 처리 오류가 난 것처럼 감정도, 말도 정리되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조금 취한 것 같아요."
나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잠깐 비틀거렸다. 홀짝홀짝 마신 맥주가 전신을 타고 혈관으로 번지고 있었다.
알코올로 인해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코는 맹맹해졌고, 두통까지 밀려왔다.
그럴 만도 했다. 나래는 오늘 여행이 기대돼서 전날 잠을 설쳤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소에다와 시간을 보내느라 온몸이 지쳐 있었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고백까지 겹치자,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래는 그저, 따뜻한 침대 속에서 눈을 감고 싶었다.
소에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딱히 어떤 말이 적절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래가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는 역시나 아직은 어린 나이인 건가?'
"나래? 괜찮아?"
비틀거리는 나래의 팔을 소에다가 재빨리 잡아주었다.
닭살이 잔뜩 올라 있는 나래의 팔을 보며, 그녀가 춥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안아줄까?"
소에다가 나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 했다.
나래는 소에다의 손을 거절했다.
"선생님... 지금은 그냥 얼른 침대에 들어가서 자고 싶어요. 몸이 너무 차고... 머리도 아파요."
천천히 걸어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포근했다.
침대가 나래의 몸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며, 술기운과 복잡한 감정들이 섞인 모든 신경이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너무나도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잡고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았다.
"나래, 괜찮아?"
"선생님, 조금 취한 것뿐이니까 걱정 마세요. 조금 자고 나면 다시 컨디션 회복돼요..."
나래는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선생님."
"응?"
"그 아이는... 어디 있어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쥔 채,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바닥의 한 점을 응시했다.
"...없어. 나는 그녀에게 아기가 생긴 줄도 몰랐으니까."
소에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에다의 눈앞에 아야코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얀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그날따라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하얀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면서 소에다의 시선을 피했다.
"쇼이치... 우리 그만 만나. 나 더 이상 못 견디겠어."
그 말을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에다의 손바닥에 약혼반지를 쥐어주고 사라졌다.
그녀의 집에 찾아가고 일하는 병원에 찾아갔지만 이미 그녀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소에다는 자신의 부모가 반대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 사이를 인정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결국 소에다는 그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한동안 일상생활을 하는 것 조차 힘들었다.
소에다가 생각한 최후의 방법은 도쿄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향기와 그리움과 낭만과 추억이 남겨져 있는 도쿄에 있는 것조차 소에다는 힘들었다.
현실로 소에다를 다시 이끄는 나래의 목소리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선생님..."
나래가 소에다의 손을 세게 쥐었다.
나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 무거운 질문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할 이야기였어."
나래는 눈을 감았다. 복잡한 그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어린 그녀에게는 풀리지 않는 실타래와 같았다.
"나래."
"...네."
소에다가 나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너를 만나고 내 상처가 치유되었어. 너의 미소가 너의 무한 긍정이 나를 구원해 주었어."
나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와 함께라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
나래는 또다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소에다의 손을 꽉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소에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 맥주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진전된 후에 말할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동시에 가슴이 조금 가벼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숨겨선 안 될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나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솔직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래의 숨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에다는 조용히 불을 끄려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선생님."
나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마지막 딱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요."
소에다는 멈춰 섰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럼 그 여자분... 그 이후로 만난 적은 있으세요?"
나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 이후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대신에 그녀를 알고 있는 친구가 딱 한 번 소식을 전해준 적은 있어."
나래의 숨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타고 들려왔다.
"나와 헤어지고 딱 2개월 만에 결혼했다고 하더라고..."
소에다는 불이 다 꺼져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생님이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침묵이 흘렀다.
"내일까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저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소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나래가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천천히 생각해."
"네. 잘 자요, 선생님."
"...잘 자, 나래."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긴 하루를 보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나요?
이번 화를 쓰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건 쉽지만,
막상 그 무게를 마주하면 누구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저 역시 예전에 비슷한 아픔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50화를 쓰며,
소에다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나래의 마음뿐 아니라
그 말을 내뱉는 소에다의 무게까지 함께 느껴졌습니다.
사랑은 때로,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을 용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