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탕에서의 달빛과 고백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49화

by 파랑몽상

보름달이 내려앉은 후라노의 밤, 노천탕의 침묵과 호텔방의 고백 사이—

나래는 소에다의 과거를 묻고, 소에다는 결심한다.

사랑과 진실 사이, 숨겨진 진심이 드러나는 밤.


PART 1. 노천탕의 침묵

그날 밤, 나래는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다.


뜨거운 물, 차가운 마음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래는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소에다의 말을 곱씹었다.

'도대체 전에 누구랑 같이 와봤다는 거지?'

뜨거운 물속에서도 가슴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소에다 선생님에게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


보름달 아래의 침묵

소에다는 자신만의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물결처럼 생각이 일렁거렸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물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흩어졌다.

'나래에게 실수한 건 없겠지? 괜한 말을 한 건 아니었을까.'

자신이 내뱉은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금 예전 기억을 떠올린 자신이 스스로 싫어졌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물거품처럼 맺혔다가 사라졌다.


기다림의 밤

소에다는 나래보다 조금 일찍 목욕탕에서 나와 연보랏빛 라벤더색 유카타를 입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땄다.

첫 모금을 삼키자 쌓였던 긴장과 목마름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소에다는 고개를 돌렸다.

나래도 그와 같은 라벤더색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목욕 후의 붉은 기운이 그녀의 양볼에 감돌았다.

"어? 선생님이 먼저 와 계셨네요?"

나래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소에다의 손에 들린 맥주 캔으로 향했다.

"오~ 맥주도 한잔하고 계시고."

소에다는 손에 든 맥주를 올려 보이며 미소 지었다.

"응. 목욕하고 나왔더니 목이 말라서 먼저 마셨어."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래도 얼른 와서 앉아. 룸서비스시켰는데 괜찮지? 나래가 좋아하는 치킨이랑 간단한 스낵도 시켰어."

나래는 주저하면서 소에다의 옆자리에 앉았다.


PART 2. 유카타를 입은 두 사람

같은 색 유카타를 입은 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민낯을 보이는 용기

"저 화장 안 했는데... 괜찮아요?"

나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쑥스럽게 웃었다.

"ㅎㅎ 저의 민낯, 괜찮겠어요?"

소에다는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린 듯 활짝 웃었다.

나래의 웃음은 모든 걱정을 날려버리는 힘이 있었다.

"평생 볼지도 모를 민낯인데... 괜찮지 않을까?"

나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소에다의 말이 거짓이든 진심이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사랑이 되는 걸까. 나래는 용기를 내어 소에다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슬처럼 맺힌 마음

시원한 맥주가 잔에 따라지자 금세 잔의 겉면에 이슬이 맺혔다.

소에다가 그녀에게 따라준 맥주는 그저 맥주가 아니었다. 어른의 세계로 가는 초대장 같았다.

"건배해요, 선생님."

나래는 소에다와 잔을 부딪혔다.

같은 라벤더색 유카타를 입고 같은 공간에 있는 이 순간,

둘이 연인이라는 게 공기를 통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나래와 많은 것을 경험한 소에다.

둘 사이의 거리는 11년이라는 나이 차이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소에다는 자신도 모르게 나래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무지게 다문 입술, 살짝 풀어진 긴장감에 장난기가 가득한 두툼한 볼,

그리고 물기가 약간 묻어 얼굴에 달라붙은 단정한 단발머리. 그 모든 것이 싱그러워 보였다.


설레는 손길

나래가 잔을 입술에 가져가려는 찰나, 소에다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는 그저 젖은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낼 뿐이었는데, 나래의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으아!"

나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소파 끝으로 밀려났다.

맥주가 잔 속에서 철썩 출렁였다. 심장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소에다는 그런 나래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이랑 맥주를 같이 마시고 있어서 그래. ㅎㅎㅎ"

소에다는 웃으며 나래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섬세했다.

그가 알게 모르게 보여주는 배려는 언제나 나래를 놀라게 했다.

나래는 지금껏 소에다의 손길이 거칠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기운에 떠오르는 용기

맥주 두 잔을 마시자, 나래의 얼굴은 석양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나래의 입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선생님..."

나래는 말을 하다 말고 키득거렸다.

"선생님 아시죠? 저 술 못 마시는 거... 아, 여기서 더 마시면 안 돼요.

더 마시면 웃음이 많아지고 말도 많아지거든요.."

나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에다를 바라보았다.

맥주 두 캔에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아시죠? 저 지금까지 21살이 되도록 한 번도 남자친구 사귄 적 없다는 거요."

술기운에 말이 자꾸 끊겼지만, 그녀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제 첫 키스가 선생님이라는 거. 남자친구랑 여행 와본 것도... 남자친구랑 호텔에 온 것도..."

나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전부 다 선생님이 처음이라는 거요. 아세요?"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에다의 손이 맥주 캔을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나래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 깊은 곳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움이 가슴까지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49화 이미지.png

PART 3. 과거를 향한 질문

이제는 물어야 할 때였다. 나래는 알고 싶었다.


가슴속의 궁금증

나래는 소에다의 침묵에 용기를 내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테이블 위의 소에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선생님."

나래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어떤 아픈 과거가 있으세요?"

그 질문은 마치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것 같았다.

나래의 눈빛은 진지했다.

"전 뭐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제가 너무 사랑하는 선생님이니까..."

나래의 목소리는 자꾸만 속삭임이 되어갔다.

"무슨 말을 하든 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에다의 팔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온기가 느껴졌다.

소에다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나래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질문이 너무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픈 과거......"

소에다는 천천히 나래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 손길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드러나는 의문의 실마리

"네..... 아픈 과거요."

나래의 목소리는 또렷해졌다.

"그리고 아까 여기 몇 번 와본 사람처럼 말씀하셨어요..."

소에다의 손이 굳었다. 나래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 따뜻한 손바닥이 순간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제가 이곳을 좋아할 줄 알았다고."

나래는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눈치 없는 저라도 그건 알 수 있어요."

나래는 소에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선생님, 이곳에 몇 번 와 보셨죠?"

소에다의 입술이 움직이려다 멈췄다. 한 번, 두 번.

나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미나코도 말했어요. 선생님이 도쿄에서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고."

소에다의 눈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놀람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그래서 오늘은 꼭 듣고 싶었어요.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나래는 소에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저는 뭐든 이해할 수 있어요."


창가에 선 남자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천천히, 천천히 풀어냈다.

그리고 일어섰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마치 발목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차고 걷는 사람처럼.

창가로 다가선 소에다는 어둠 속에 잠긴 숲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어 은은한 빛의 바다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등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 아직 말할 준비가 안 됐어.'

나래는 소파에 앉은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벤더색 유카타를 입은 어깨가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아니, 외로운 게 아니라 무거워 보였다.

갑작스러운 나래의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

다만, 자신보다 11살 어린 나래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고 말하는 순수한 나래에게 어떤 말이 가장 좋은 선택일지,

소에다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자신도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소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나래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선생님이 준비될 때까지.'

소에다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저렸다.

이제는 말할 시간이었다.



✍️ 작가의 말

매회 소설을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들이 제 글을 읽어 주실까?
정말 재미있게 읽고 계실까?’

그런 마음으로 매번 원고를 씁니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대학에서는 일본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나만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어왔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유학 경험과 기억을 녹여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를 쓰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는 시간은 제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한 문장, 한 마음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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