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시선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70화

by 파랑몽상

나래의 시선


겨울이 시작되는 방에서

중간고사가 끝났다.

책상 위를 가득 메웠던 노트와 책들이 치워지자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창밖에서는 겨울의 전령처럼 눈발이 조용히 흩날리고 있었다.

후카가와의 겨울은 빠르다.
11월이 되면 사람들은 이미 긴 겨울을 받아들인다.
두꺼운 패딩, 방한 부츠, 스노 타이어를 단 자동차들.
도시는 서서히 겨울의 몸짓을 닮아간다.

나래는 아르바이트에 나가기 전,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패딩을 꺼냈다.
밤 11시에 끝나는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분명 몹시 추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오늘은 좀 쉬고 싶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연일 시험 준비를 하느라 잠이 부족했을 뿐이고,
요즘은 문득 소에다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인데…
선생님은, 내 어떤 점을 좋아하게 된 걸까.

며칠 전 밤이 떠올랐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
소에다는 직접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어 주었다.
모시조개와 루콜라, 나래를 위해 준비한 스파클링 와인.

같은 침대에 누워 소에다의 품에 안긴 채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밤.


조심스러운 사랑의 온도


소에다는 늘 그랬다.
달콤한 키스까지는 허락하면서도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조심스러움이 나래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에다의 서두르지 않는 마음은
나래에게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선생님은… 나를 지켜주고 싶은 거야.

사랑은 꼭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래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작은 등불처럼,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이 있다는 걸.

내일은 하코다테로 떠난다.
전망대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나래는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저는…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이제는 정말, 선생님의 여자인가요?"



소에다의 시선


연민에서 사랑으로

나래는 소에다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다.

처음 그녀의 나이와 국적을 들었을 때,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밝고 당당한 웃음을 가진 한국인 유학생은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병원 바비큐 파티에서 마주한 나래는
그저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서툰 일본어로 분위기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도와주고 싶었다.

그때의 감정은
아마도 연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얼굴.
그의 작은 농담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어 주던 그녀.


질투라는 이름의 자각


나래가 아팠던 날,
소에다는 정성껏 끓인 죽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가슴에 안겨
“엄마가 보고 싶다”라고 울던 나래는
강해 보였지만, 아직은 연약한 스물한 살의 여자아이였다.

그날 이후였다.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떠나는 나래의 뒷모습을 보며
질투라는 감정이 온몸을 휘감은 순간,
소에다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이나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자신을 웃게 만드는 사람을.
하루 종일 떠올리게 하고,
하루를 유난히 길게 느끼게 만드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조심스러웠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리게 걷기로 한 이유


그래서 한 걸음씩, 느리게.
다시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늘 한 걸음 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의 나래는 달라졌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그녀는
이제 그의 손을 먼저 잡고,
먼저 입을 맞추며
사랑이라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소에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하코다테로 떠난다.
야경이 펼쳐진 그곳에서
소에다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나래는 나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 걸어갈 수 있어?"

그의 사랑은 가벼운 연애가 아니었다.

함께 늙어가고 싶은 사람,
인생이라는 긴 길을
같이 걷고 싶은 단 한 사람.

그가 선택한 이름은
이나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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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예비 중학교 3학년 딸과
예비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세월이라는 것은 제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아이들을 이렇게 자라게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방학은… 참 길네요.

하루하루가 반복되는데
마음의 여유는 점점 줄어들고,
요즘은 스트레스 지수가 꽤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얼른 따뜻한 봄이 와서
햇살 좋은 카페 한쪽에 앉아
아무 방해 없이 소설을 쓰고 싶다고요.

그저 조용히,
이야기 속 인물들과 숨을 고르듯
글을 쓰고 싶어 졌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렇게 한 편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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