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미즈키의 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 74화

by 파랑몽상

시간이 멈춘 공간

전통 목조 건물 특유의 은은한 편백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료칸 '하나미즈키'의 현관에 들어선 순간,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오직 대나무 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만이 은밀하게 귓가를 스쳤다.

"어서 오십시오, 소에다 님."

기모노를 입은 오카미상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타고난 우아함이 있었다.

어색해하는 나래의 손을 소에다가 살며시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서서히 팔목까지 번져 올랐다.

"저희 하나미즈키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약해 주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소에다 또한 오카미상에게 친분이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인사를 했다.

"3년 만인 것 같습니다. 잘 지내셨죠?"

나래는 그제야 깨달았다. 소에다는 이곳을 자주 이용하던 고객이었던 것이다.

오카미상이 멀어지자, 소에다가 나래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는 우리 가족이 홋카이도에 오면 가끔씩 쉬러 오는 곳이야."

그의 가족과 공유하던 공간에 자신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나래를 한순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래의 불안한 시선을 눈치챈 소에다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어주었다.

"괜찮아, 나래. 오카미상은 입이 무거운 분이니 걱정 마."


절제된 아름다움

로비는 절제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천장 높이까지 이어진 통유리 너머로 일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명은 은은하게 바닥을 비추며 발걸음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어둠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정갈한 자갈들은 동글동글하게 일정한 군락을 만들며 가로등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벽면에 걸린 서예 작품의 먹색이 공간에 깊이를 더했다.

오카미상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는 나래는 발걸음조차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여기입니다."

방 문이 열리자 나래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통창 너머로 펼쳐진 쓰가루 해협의 어둠 속, 석등이 은은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방 중앙의 낮은 테이블 위, 찻주전자는 하얀 김을 뿜으며 따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와..."

나래의 입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소에다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마음에 들어?"

"이런 료칸... 영화에서 본 것 같아요."


깃털 같은 이불

나래는 창가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겨울 바다는 고요했지만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어선들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곳곳을 구경했다. 정갈하게 꽂혀 있는 꽃들이며 도자기들을 보면서 이곳이 결코 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이불 두 채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나래는 그중 한 곳에 벌렁 누웠다.

"우와!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데요?"

나래는 순간 피곤이 몰려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온몸을 대자로 펼쳤다.

"그렇게 편하다면 나도 누워볼까?"

소에다도 이불 위로 털썩 몸을 던졌다. 소에다의 손끝이 나래의 손에 닿았다.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잡았다. 나래도 몸을 옆으로 돌려 소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유학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이불 꼭 사고 싶어요."

나래의 말에 소에다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사도 돼. 홋카이도에서 사면 안 돼? 나래가 좋아하면 우리 집에 하나 사놔야겠다. 그러면 나래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일이 많겠지?"

소에다는 나래를 품에 안았다. 나래는 깊은숨을 쉬었다.

그의 품에서 편안함과 안심을 느꼈다.


가이세키의 예술

"실례하겠습니다."

소에다와 나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직원들의 부름에 잠이 깼다.

"네, 들어오십시오."

오카미상이 직접 와서 테이블에 세팅을 했다. 오카미상과 직원들의 움직임은 마치 무용을 보는 것 같았다.

접시 하나, 젓가락 하나까지도 정확한 위치에 놓였고, 나래는 그 세심함에 감탄했다.

"오늘 저녁은 하코다테 특선 가이세키로 준비했습니다."

오카미상이 직접 설명해 주었다.

"제철 활 오징어와 다랑어 참치, 그리고 쓰가루 해협에서 갓 잡아 올린 해산물들입니다."

첫 번째 요리가 나왔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회가 마치 바다의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얇게 썬 오징어 살이 거의 투명할 정도로 신선했고, 그 위에 올려진 미나리와 무순이 한 편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오징어예요?"

나래가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입에 넣는 순간, 바다의 단맛이 혀끝에서 터졌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뒤따라오는 깔끔한 여운.

"이건 그냥 오징어가 아닌데요? 이렇게 맛있는 오징어가 있다니..."

나래의 말에 소에다가 웃었다.

"하코다테 오징어는 특별해. 이 차가운 바다에서 자란 덕분에 육질이 단단하고 달아."

두 번째 요리는 참치 뱃살 생선회였다.

붉은 살코기가 대리석 무늬처럼 아름답게 마블링을 이루고 있었다. 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 순간,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부드러움과 함께 바다의 깊은 맛이 퍼져나갔다.

세 번째로 나온 것은 홋카이도산 성게였다.

작은 도자기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긴 주황빛 성게알이 보석처럼 빛났다.

"천천히 먹어. 따뜻하게 데운 일본 술이랑 같이 먹어. 진짜 잘 어울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입에 넣은 순간, 나래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바다의 진한 향과 함께 크림처럼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 가득 퍼졌다.

"제가 지금까지 먹었던 성게는... 성게가 아니었단 말인가요?"

나래의 말에 소에다는 큰 소리로 웃었다.

요리는 계속해서 나왔다.

홋카이도산 털게 살과 내장으로 만든 진한 수프, 제철 가리비를 구워 버터와 간장으로 간을 한 야키모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홋카이도 쌀로 지은 밥과 함께 나온 된장국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직원이 조용히 테이블을 치웠다.

방 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고, 창밖의 바다만이 변함없이 어둠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소에다가 술잔을 기울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침묵이 길었다.

나래는 그 침묵이 편안하면서도 왠지 모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느꼈다.

"나래야."

소에다가 조용히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없던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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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현타’라고 하지요.

매주 브런치에 소설을 올리면서, 어느 날 문득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아마추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부족한 제가 감히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점에 가면 신간 소설이 쏟아지듯 진열되어 있고,
그중에는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작품도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 적도 없는 제가
이 길을 계속 걸어도 되는 걸까,
괜히 허황된 꿈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글을 멈추고,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끝까지 완성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 리즈 시절의 조각들을 담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
설렘과 서툶, 그리고 그 시절의 공기를 다시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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